제21대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AD 479~500) 3년 : 기원후 481년
▶ 비열성에 행차하여 군사들을 위로하다 : 481년 02월(음)
- 三年, 春二月, 幸比列城, 存撫軍士, 賜征袍.
- 3년(481) 봄 2월에 비열성(比列城)[1]에 행차하여 군사들을 위로하고 군복을 내려 주었다.
▶ 신라·백제·가야 연합군이 고구려와 말갈의 공격을 격퇴하다 : 481년 03월(음)
- 三月, 髙句麗與靺鞨入北邊, 取狐鳴等七城, 又進軍於彌秩夫. 我軍與百濟·加耶援兵, 分道禦之, 賊敗退. 追擊破之泥河西, 斬首千餘級.
- 〔3년(481)〕 3월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에 쳐들어와 호명성(狐鳴城)[2] 등 7성을 빼앗고, 또한 미질부(彌秩夫)[3]로 진군하였다. 우리 군사는 백제·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누어 막으니 적이 패하여 물러갔다. 이하(泥河)[4] 서쪽까지 추격해 물리치고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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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비열성(比列城) : 현재의 북한 강원도 안변군 안변읍에 있었던 성. 본서 권35 잡지4 지리2 삭주(朔州)조에 삭정군(朔庭郡)은 본래 고구려 비열홀군(比列忽郡)인데 진흥왕(眞興王) 17년(556)에 비열주(比列州)로 삼고 군주(軍主)를 두었고, 효소왕(孝昭王) 때 성을 쌓았는데 둘레는 1,180보(步)이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고 되어 있다. 고려 때에는 등주(登州)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라고 하였다. 현재의 북한 강원도 안변군 안변읍에 해당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9 함경도 안변도호부 성곽조에는 학성산성(鶴城山城)이 본부 동쪽 5리에 있는데, 석축으로 둘레가 3,930척에, 높이가 12척이고 그 안에 네 개의 우물과 군창(軍倉)이 있다고 되어 있으며, 신라 효소왕(孝昭王) 때에 쌓은 비열홀성이 이것이 아닌가 하였다. 비열성은 원래 고구려 성으로 「광개토왕릉비」에는 비리성(碑利城)으로 나타나 있다. 지리지에 나오는 대로 신라 진흥왕 때 함흥 일대를 차지하여 비열홀주를 설치하였다.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561)에는 사방군주(四方軍主)의 하나로 비리성(碑利城) 군주(軍主)가 나온다. 그 뒤 고구려에게 다시 빼앗겼다가 666년 연정토의 투항으로 이 지역을 다시 확보하였고(노태돈, 248~250쪽), 우수(牛首), 즉 현재의 춘천에 있던 정(停)을 옮겨 다시 비열홀주를 설치하였다(본서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8년(668)). 673년에는 비열홀정(比烈忽停)을 없애고 다시 우수정(牛首停)을 설치하여(본서 권40 잡지9 직관 무관), 우수(牛首)가 일대의 주치(州治)로 확정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학성산성이 신라 효소왕 때 쌓은 성이 아닐까 추정했는데, 이 산성은 대체로 고구려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남일룡, 1994). 만약 그것이 맞다면 비열성 혹은 비리성은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취득한 것이 된다. 소지왕대에는 비열성이 여전히 고구려의 영역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이 시점에 소지왕이 비열성에 행차했다고 한 것은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려울 것이다.
〈참고문헌〉
남일룡, 1994, 「학성산성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4-4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 호명성(狐鳴城) : 대체로 현재의 경상북도 청송, 영덕에 비정되지만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먼저 청송설은 이병도가 이를 청송군 호명산(虎鳴山)에 비정한 뒤(李丙燾, 77쪽) 많은 연구자가 호명성을 청송에 비정했다(鄭雲龍, 13쪽; 서영일, 51쪽; 이인철, 306~308쪽; 양기석, 16쪽). 그렇지만 조선 시대 지리서의 청송, 진보(眞寶) 부분에서는 호명산이라는 지명을 찾을 수 없으며, 오히려 다른 지역에서 찾아지기도 한다. 다만 『대동지지(大東地志)』 진보(眞寶) 산수(山水)조에 호명천(虎鳴川)이 보인다. 한편 손영종은 영덕의 본명이 야시홀(也尸忽)이라는 데(본서 권35 잡지4 지리2 명주 야성군) 주목했다. 곧 야시=여우의 옛말 혹은 사투리이고, 홀은 고구려의 성이므로 호명성의 위치를 영덕으로 보았다(손영종, 34쪽).
〈참고문헌〉
李丙燾 譯註, 1983, 『三國史記 上(新裝版)』, 乙酉文化社
손영종, 1985, 「중원고구려비에 대하여」, 『력사과학』 85-2
鄭雲龍, 1989, 「5世紀 高句麗 勢力圈의 南限」, 『史叢』 35
서영일, 1999, 『신라 육상교통로 연구』, 학연문화사
이인철, 2000, 『고구려의 대외정복연구』, 백산자료원
양기석 외, 2001, 『新羅 西原小京 硏究』, 서경
장창은, 2008, 『신라 상고기 정치변동과 고구려 관계』, 신서원 - 미질부(彌秩夫) : 현재의 경상북도 포항시 흥해읍. 미질부를 흥해에 비정하는 것은 미질부와 흥해의 옛 이름인 퇴화(밀벌)가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본서 권34 잡지3 지리1 양주(良州)조에 의창군(義昌郡)은 본래 퇴화군(退火郡)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으며 고려 때의 흥해군(興海郡)이라고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2, 경상도 흥해군 고적조에는 미질부성(彌秩夫城)이 나오며, 『주관육익(周官六翼』을 인용하여 고려 태조(太祖) 13년에 북미질부(北彌秩夫) 성주(城主) 훤달(萱達)이 남미질부(南彌秩夫) 성주와 함께 와서 항복했으므로 두 미질부(彌秩夫)를 합쳐서 흥해군(興海郡)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 기사는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지만 미질부가 흥해에 비정된다는 것은 거의 분명하다.
- 이하(泥河) : 현재의 남한강 상류 혹은 강릉 일대에서 동해로 들어가는 하천.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지마이사금 14년(125) 7월조 기사의 주석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