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25일 월요일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20대 자비마립간(AD 458~479) 12년 : 기원후 469년

20대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AD 458~479) 12: 기원후 469

 

서울의 방·리 이름을 정하다 : 46901()

 

  • 十二年, 春正月, 定京都坊里名.
  • 12(469) 봄 정월에 서울[京都]의 방(()[1] 이름을 정하였다.

 

나라 서쪽에 홍수가 나다 : 46904()

 

  • 夏四月, 國西大水, 漂毀民戸.
  • 12(469)여름 4월에 나라 서쪽에 홍수가 나서 민가가 떠내려가고 무너졌다.

 

물난리를 겪은 주·군을 다니며 위로하다 : 46907()

 

  • 秋七月, 王巡撫經水州郡.
  • 12(469)가을 7월에 왕이 물난리를 겪은 주(()을 다니며 위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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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 : 방리(坊里)는 보통 도성(都城)의 행정구역으로서 방()과 리()를 말하며, 방과 리의 체계는 당나라 때 형성되었다. 중국에서 원래 도성 내지 현성(縣城)의 행정구역은 리()였다. 북위(北魏) 낙양성(洛陽城) 단계에는 성 밖의 일정한 범위를 격자형 도로로 구획하고 담장을 쳐 도성민의 거주 공간으로 삼았는데, 이러한 구획을 공식적으로 리()라고 불렀고 민간에서는 방()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 장안성(長安城)에서도 황성(皇城) 밖 나성(羅城) 내부의 공간을 격자형 도로로 구획하고 담장을 쳤는데 이러한 구역을 공식적으로 방()이라고 지칭하였다. 그리고 리()는 그것보다 하위의 단위로 자리 잡게 되었다(전덕재, 137~138).
    신라 역시 이러한 제도를 받아들였지만, 중대한 차이가 있다. 신라의 왕도(王都)1차적으로 6부로 구분되었으며, 각 부는 다시 리로 나뉘었다. 중대에 35, 하대에 55리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방의 수는 하대에 1,350방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본서 권34 잡지3 지리1 신라 왕도; (삼국유사권제1 기이제1 진한)). 이때 방은 역시 격자형 도로로 둘러싸인 한 구역으로 추정되는데, 방의 수가 리의 수보다 훨씬 많았다는 것이며, 리가 방보다 상위의 행정구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체로 리의 제도를 먼저 받아들이고, 당대(唐代)에 들어 도로로 둘러싸인 구획을 방이라고 지칭하는 용법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때 방리의 이름을 정했다는 것은 대체로 리의 제도를 도입하였음을 의미한다고 보는 편이 일반적이다(전덕재, 158). 6부 아래 리의 행정구역을 두었다는 것이다. 이때 리제 도입의 의미에 대해서는 몇 가지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6부 아래의 기존 취락을 리로 편제했을 가능성, 새로 구획을 해서 리로 편제했을 가능성 등이 있다. 월성 해자에서 출토된 목간 중에서 부별로 리와 리가 아닌 하위 행정구역을 나열한 문서가 확인되었다. 여기에는 모량부에 소속된 신리, 상리, 중리, 하리 등의 명칭이 나타나 있다. 이것은 기존의 취락에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새로운 도시 구획을 의미할 가능성이 있다(박성현, 266~268). 리제의 도입, 리명의 부여는 이처럼 도시 구획의 시작을 의미할 가능성이 크지만, 이 시점에 본격적인 도시 구획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참고문헌
    전덕재, 2009,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박성현, 2018, 월성 해자 목간으로 본 신라의 왕경, 목간과 문자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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