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24일 일요일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7대 나물이사금(AD 356~402) 38년 : 기원후 393년

17대 나물이사금(奈勿尼師今, AD 356~402) 38: 기원후 393

 

왜인을 독산에서 크게 물리치다 : 39305()

 

  • 三十八年, 夏五月, 倭人來圍金城, 五日不解. 將士皆請出戰, 王曰, “今賊弃[의 고자이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는 를 따랐다.]舟深入, 在於死地, 鋒不可當.” 乃閉城門. 賊無功而退, 王先遣勇騎二百, 遮其歸路, 又遣歩卒一千, 追於獨山. 夾擊大敗之, 殺獲甚衆.
  • 38(393) 여름 5월에 왜인(倭人)이 와서 금성(金城)[1]을 에워싸고 5일 동안 포위를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말하기를, “지금 적들은 배를 버리고 깊이 들어와 사지(死地)에 있으니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다.”라고 하고는 성문을 닫았다. 적이 아무런 성과 없이 물러가자, 왕이 용맹한 기병 200명을 먼저 보내 그 돌아가는 길을 막고, 또한 보병 1,000명을 보내 독산(獨山)[2]까지 추격하였다. 왜인을협격하여 크게 물리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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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금성(金城) : 신라의 경성(京城) 혹은 초기의 궁성(宮城).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혁거세거서간 21(B.C.37)조의 주석 참조.
  2. 독산(獨山) : 위치 미상. ‘독산(獨山)’은 본서 신라본기에 모두 다섯 차례 나오는데, 이 가운데 나물이사금 38(393) 5월조, 실성이사금 4(405) 4월조, 눌지마립간 28(444) 4월조의 기사에 보이는 독산은 동일한 실체로 볼 수 있다. 세 기사에서 모두 왜병(倭兵)의 퇴각로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독산이라는 지명을 후대의 지리서에서 찾아보면, 먼저 신증동국여지승람경주부(慶州府) 봉수(烽燧)조에 독산봉수(禿山烽燧)’가 보인다. 현재의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 봉우재에 위치하고 있는데, 왜병의 퇴각로로 볼 수는 있지만 한자가 다른 것이 문제가 된다. 그리고 동경잡기(東京雜記)1 산천조 신증(新增: 신증동국여지승람이후에 새로 추가한 부분)에 독산(獨山)이 나온다. 이것은 향교산(鄕校山)이라고도 하는데, 신광현 동쪽 2리에 있다고 되어 있어 현재의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신광면 토성리, 사정리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독산은 넓은 들 가운데 우뚝 솟아 있으며 그 위에 토성이 있는데, 토성의 모양은 두 겹으로 되어 있고 그 안에 우물이 있어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신광면 역시 곡강천을 통해 바다로 나아갈 수 있어, 신라본기 상고기 기사에 보이는 독산을 여기에 비정할 수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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