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대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 AD 247~261) 3년 : 기원후 249년
▶ 석우로가 왜에게 죽임을 당하다 : 249년 04월(음)
- 三年, 夏四月, 倭人殺舒弗邯于老.
- 3년(249)[1] 여름 4월에 왜인(倭人)[2]이 서불한(舒弗邯)[3] 우로(于老)[4]를 죽였다.[5]
▶ 남당을 설치하고 양부를 이찬에 임명하다 : 249년 07월(음)
- 秋七月, 作南堂於宫南 南堂或云都堂., 以良夫爲伊湌.
- 가을 7월에 궁궐의 남쪽에 남당(南堂)[6][남당을 어떤 글에서는 도당(都堂)이라 하였다.]을 세우고, 양부(良夫)[7]를 이찬(伊湌)[8]에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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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3년 : 본서 권45 열전5 석우로전에서는 첨해이사금 7년(253)의 일이라고 적혀있어 논란이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200년의 일이라 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이 시기 『일본서기』의 기년을 120년 뒤로 미루어야 한다는 통설에 입각하면 4세기대의 일일 가능성도 있다(李基東, 1997; 강종훈, 2011).한편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권3 첨해왕 3년 정월조와 『동국통감(東國通鑑)』 권3 첨해왕 봄조 및 본서 권45 열전5 석우로전에 신라가 우로를 파견하여 백제를 도운 사량벌국을 멸망시켰다는 기사가 있는데, 여기에는 누락되어 있다.〈참고문헌〉李基東, 1997, 『新羅社會史硏究』, 一潮閣강종훈, 2011, 『삼국사기 사료비판론』, 여유당
- 왜인(倭人) : 본서 권1 신라본기1 혁거세거서간 8년(B.C.50)조의 주석 참조.본서 권45 열전5 석우로전를 보면, 이때 우로가 왜국의 사신 갈나고(葛那古)에게 왜왕을 모욕하는 말을 하자, 이를 전해 들은 왜왕이 장수 우도주군(于道朱君)을 보내 신라를 공격해왔다고 한다. 이를 따르면 당시 일본 중앙 정부가 신라를 공격하여 우로를 죽인 것이 된다. 그러나 당시 왜가 통일된 국가로서 신라를 공격했다고 볼 수는 없다(연민수, 340~370쪽 참조). 『일본서기』 권9, 신공기(神功紀) 즉위 전 중애(仲哀) 9년(200) 12월 신해조의 세주에는 석우로전과 비슷한 이야기가 전한다. 하지만 200년의 일로 기록되어 연대상 문제가 있으며, 석우로를 신라왕으로 적고 있어 일정한 의도를 가지고 사실을 왜곡한 기사로 여겨진다(강종훈, 2011).〈참고문헌〉연민수, 1998, 『고대한일관계사』, 혜안강종훈, 2011, 『삼국사기 사료비판론』, 여유당
- 서불한(舒弗邯) : 신라 경위 17관등 중 제1등 이벌찬(伊伐湌)의 이칭이다. 이벌찬에 대해서는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9년(32)조의 이벌찬에 대한 주석 참조.이 기사의 서불한은 신라 제1관등으로서의 각간의 지위라기보다는, 초기 6부 연합체적 국가였던 신라를 구성하던 핵심 지배집단의 수장이자 다른 수장들을 대표하는 지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하일식, 2006, 『신라 집권 관료제 연구』, 혜안).한편 나해이사금 14년(207) 7월에 나해이사금이 ‘태자 우로’와 ‘이벌찬 이음’을 보내 ‘포상팔국의 난’으로 어려움에 처한 가야를 구원하게 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을 적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제5 피은제8 물계자조에는 ‘태자 이음’과 함께 ‘장군 일벌(一伐)’을 파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장군 일벌’을 ‘장군 일벌(찬) 우로’의 오기로 보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우로가 이미 나해이사금대에 이벌찬(서불한)의 지위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조분이사금 15년(244) 우로가 서불한에 임명되었다는 기사가 있으므로, 설사 『삼국유사』의 ‘일벌’이 ‘우로’가 맞다고 해도, 이는 후대의 지위를 소급하여 적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나해이사금 14년 7월조의 ‘태자’라는 칭호도 당시의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 석우로(昔于老) : 나해이사금의 아들로 나해이사금대에서 첨해이사금대까지 주로 군사적인 활동을 한 인물이다. 본서 권2 신라본기2 나해이사금 14년(209) 7월조의 석우로에 대한 주석 참조.그는 조분이사금대에 여러 군공을 세워 조분이사금 15년(244)에 최고 직위라 할 수 있는 서불한에 올라 국정을 이끌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왜군에게 피살되었다. 후에 우로의 아내가 계략을 세워 원수를 갚았으며, 그의 아들 흘해(訖解)가 신라 제16대 왕이 되었다.
- 3년 … 석우로(昔于老)를 죽였다 : 석우로가 왜인에 피살된 시기는 그가 활동한 시기를 보여준다. 우로의 활동 및 사망 시기는 『삼국사기』 초기 기사들의 기년을 믿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연관하여 논란이 되어왔다. 본서 신라본기에 의하면 첨해이사금 3년(249)에 죽었고, 열전 석우로전에는 첨해이사금 7년(253)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같은 내용을 다룬 『일본서기(日本書紀)』 권9, 신공기(神功紀) 즉위전조에는 나해이사금 5년(200) 12월 14일의 일이라 적고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본서에 비해 약 50년 정도 사망 시기가 빠른데, 왜곡의 가능성이 많으므로 연대의 신빙성이 높지 않다. 그러나 기록에 모두 우로가 3세기 전반 이전에 활동한 인물로 적고 있다고 보아도 문제가 없겠다.그런데 나해이사금 14년(209) 석우로가 소위 ‘포상8국의 난’에 가야를 돕기 위해 파견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포상8국의 난’이 있었던 시기에 대해 본서의 기년을 믿을 수 있다고 보고 3세기 초반으로 보는 견해와 그대로 믿을 수 없으므로 기년을 조정해야 한다고 보는 견해들이 있다. 기년 조정설은 학자에 따라 3세기 말에서 7세기까지 매우 다양하게 제기되어 있다(정상희, 2018). 특히 4세기 전반설이 강하게 제기되었다(金泰植, 1994). 만약 ‘포상팔국의 난’이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후대의 일이라고 본다면 우로의 활동 및 사망 시기도 같이 조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이와 관련하여 우로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도 문제가 된다. 흘해는 310년 기림이사금(基臨尼師今)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전왕에게 아들이 없어서 군신들이 논의하여 그를 옹립하였다. 그런데 그때 “흘해가 어리지만 노성한 덕이 있다.”는 언급이 나온다. 즉 흘해가 즉위한 310년 시점에 그가 어리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는 나이였다는 것이다. 만약 우로가 249년이나 253년에 사망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 때문에 우로와 흘해 사이에 2~3세대 정도가 더 있을 것으로 보는 입장도 있지만, 흘해이사금 즉위조에 우로가 흘해를 가리켜 “우리 집을 일으켜 세울 이는 바로 이 아이다.”라고 했다는 기록도 있는 점을 고려하면, 흘해 즉위 얼마 전에 우로가 사망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강종훈, 2011).〈참고문헌〉金泰植, 1994, 「咸安 安羅國의 成長과 變遷」, 『韓國史硏究』 86강종훈, 2011, 『삼국사기 사료비판론』, 여유당정상희, 2018, 「포상팔국 전쟁의 개전(開戰) 시기와 전쟁양상에 대한 재검토」, 『역사와 현실』 110
- 남당(南堂) : 남당은 신라의 왕궁인 월성(月城) 안에 설치된 정청(政廳)이다. 본 기사와 동왕 5년(251) 정월조 기사를 종합하면 249년 왕궁, 곧 지금의 경주 월성(月城) 남쪽에 도당(都堂)이라고도 부르는 남당(南堂)을 짓고, 251년 1월부터 이곳에서 정무를 보았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이후에도 신라본기에 나오는 바로는 미추이사금 7년(268), 눌지마립간 7년(423) 4월, 진평왕 7년(585) 3월에 각각 왕이 남당에서 정사와 관련 있는 행위를 하였다. 이후 남당은 그 이름이 등장하지 않지만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존재했다고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다.일찍이 원시시대부터 존재했던 마을의 집회소에서 기원하였다고 추정하면서, 그 성격이 변화하면서 신라 멸망시까지 존재했다고 파악되어 왔다. 초기 남당은 정사를 논의한다든지 행정사무의 처리 및 집행, 혹은 연회 및 기타 여러 가지 의식을 거행하는 등 원시집회기구의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으나, 정무가 복잡해짐에 따라 실무 행정업무는 품주(稟主)와 같은 다른 기구로 이관되고 오직 군신회의, 회견, 의식만을 거행하는 기구로 변질되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李丙燾, 1954). 더하여 남당의 실무, 행정기능이 귀족관인들의 회의기구인 정사당으로 넘어가고, 남당은 왕이 신하들과 함께 국사를 의논하던 기구로 분리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全德在, 2004).남당보다 앞서 일성이사금 5년(138) 2월에 설치된 정사당과 본서 권10 신라본기10 헌덕왕 3년(811) 4월조에 헌덕왕이 처음으로 정사를 처리하기 시작했다고 기록된 평의전(平議殿)과의 관계 역시 논란이 되어왔다. 정청이 궁실-정사당-남당-평의전으로 변화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李鍾旭, 1982), 정사당과 남당, 평의전이 공존하면서 다른 성격의 회의기구로 남았었다고 보기도 한다(朴南守, 2007). 또 정사당을 신하들의 회의기구, 남당을 왕이 신하들과 함께 국정 운영을 결정하던 의결 기구였다가 6세기 초 중앙집권국가로의 발전과 함께 국왕을 보좌하는 자문기구로 성격이 변화하였고, 하대 평의전은 남당의 전통을 계승한 합의기관으로 파악하는 입장도 있다(全德在, 2004).대체로 남당은 상고기까지는 6부 연합체적 국가체제와 연관하여 6부 유력자들의 회의 및 합의 기구로서 국가의 핵심적인 기구로 기능하다가, 중고기 중앙집권국가로의 발전과 함께 그 기능이 분화되어 갔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한편 남당의 내부 구조와 관련하여 신라의 왕호 중 하나인 마립간(麻立干)의 어원에 대한 본서 권3 신라본기3 눌지마립간 즉위년(417)조에 인용된 김대문의 글이 주목된다. “마립(麻立)이란 방언으로 말뚝[橛]을 이른다. 말뚝은 함조(諴操)를 말하는데 지위에 따라 설치하여 왕의 말뚝은 주(主)가 되고 신하의 말뚝은 그 아래에 배열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왕의] 명칭으로 삼았다.”가 그것인데, 이를 남당 내부의 구조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나아가 남당은 동서 방향으로 긴 건물 형태를 가진 남청(南廳)과 북청(北廳)이 남북 대칭으로 존재하면서, 그 가운데 넓은 마당이 있고, 마당의 동쪽에 왕이 정좌할 수 있는 전각(殿閣)이, 그리고 서쪽에 대문(大門)이 있는 구조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전덕재, 2009).〈참고문헌〉李丙燾, 1954, 「古代南堂考」, 『서울대학교논문집』 1(人文社會科學); 1985, 『(修訂版)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李明植, 1978, 「新羅 品階 및 中央官制 硏究」, 『大丘史學』 15·16李鍾旭, 1982, 『新羅 國家形成史硏究』, 一潮閣李仁哲, 1991, 「新羅의 群臣會議와 宰相制度」, 『韓國學報』 65; 1993, 『新羅政治制度史硏究』, 一志社申衡錫, 2002, 「6세기 新羅 貴族會議와 그 성격」, 『國史館論叢』 98朴南守, 2007, 「신라 화백회의 연구현황과 중층적 회의구조」, 『新羅文化』 30全德在, 2004, 「新羅 和白會議의 성격과 그 변화」, 『歷史學報』 182전덕재, 2006, 「신라 왕궁의 배치양상과 그 변화」, 『新羅文化祭學術論文集』 27; 2009,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 양부(良夫) : 이때에 남당의 설치와 함께 이찬에 임명되었다가, 미추이사금 2년(263) 1월에 서불한에 임명되어 군사 업무를 총괄하게 된다. 그 외에 기록은 없다.
- 이찬(伊湌) : 신라 경위(京位) 17관등(官等) 중 제2등에 해당하는 것이다.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9년(32)조의 이척찬에 대한 주석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