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대 나해이사금(奈解尼師今, AD 196~230) 6년 : 기원후 201년
▶ 가야가 화친을 요청하다 : 201년 02월(음)
- 六年, 春二月, 加耶國請和.
- 6년(201) 봄 2월에 가야국(加耶國)[1]이 화친하기를 청하여 왔다.
▶ 일식이 있고 가뭄이 들어 전국의 죄수를 살펴 풀어주다 : 201년 03월01일(음)
- 三月丁卯朔, 日有食之. 大旱, 錄内外繋囚, 原輕罪.
- 〔6년(201)〕 3월 정묘(丁卯)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2] 큰 가뭄이 들어 중앙과 지방의 죄수들을 조사한 후 가벼운 죄수들은 〔죄를 없게 하여〕 풀어주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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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가야국(加耶國) : 가야는 원래 변진 지역 소국들의 맹주격인 금관가야의 이름이었고, 이후 변진 지역 전체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으며, 다시 후기 가야의 맹주국인 대가야(大加耶)의 국명이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金泰植, 1993, 『加耶聯盟史』, 一潮閣, 16~20쪽).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이 기사의 가야국은 여러 소국들을 아우르는 연맹 전체의 개념이라기보다, 얼마 뒤인 나해이사금 14년(209) 7월에 포상8국의 침입으로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도움을 받았던 개별 소국으로서의 가라(加羅)로 볼 수 있다. 또 이 시점에서 가야는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었던 금관가야를 이르는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된다. 이 기사는 뒤이어 나오는 209년의 포상8국과의 전쟁과 관련이 있는 기사로 여겨진다.
- 일식이 있었다 : 일식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혁거세거서간 4년(B.C.54) 4월조의 주석 참조. 이 일식 기사는 『후한서(後漢書)』 권9 효헌제기(孝獻帝紀) 건안(建安) 6년(200) 3월조의 기사[“丁卯朔,日有食之”]를 옮긴 것인데, 3월은 2월의 오기라고 한다. 나아가 2월에 있었던 일식도 한반도에서 봤을 때 식분이 0.1~0.3에 불과한 미미한 것이었다고 한다(김일권, 2016, 「《삼국사기》 일식기록의 한중 사료 대조와 일식상황 비교」, 『新羅史學報』 37, 166쪽).
- 가벼운 … 풀어주었다 : 원문은 ‘原輕罪’로, 죄수들을 풀어주는 원죄(原罪)를 한 것이다. 사면은 현재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있든 그렇지 않든, 또 판결이나 처벌 여부와 관계없이 죄와 그에 대한 형벌집행을 일체 면제시켜주는 반면, 원죄는 현재 혐의를 받고 체포되어 있는 죄수만을 대상으로 죄를 묻지 않고 처벌을 면제해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