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대 나해이사금(奈解尼師今, AD 196~230) 27년 : 기원후 222년
▶ 우박이 내려 피해를 주고 남신현에서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다 : 222년 04월(음)
- 二十七年, 夏四月, 雹傷菽麥. 南新縣人死, 歷月復活.
- 27년(222) 여름 4월에 우박이 콩과 보리를 상하게 하였다. 남신현(南新縣)[1]에 사는 사람이 죽었는데, 한 달이 지나자 다시 살아났다.
▶ 백제군에 패한 충훤을 좌천시키고 연진을 이벌찬에 임명하다 : 222년 10월(음)
- 冬十月, 百濟兵入牛頭州, 伊伐湌忠萱將兵拒之. 至熊谷爲賊所敗, 單騎而返, 貶爲鎮主, 以連珍爲伊伐湌, 兼知兵馬事.
- 〔27년(222)〕 겨울 10월에 백제군이 우두주(牛頭州)[2]로 침범해 들어오기에, 이벌찬(伊伐湌)[3] 충훤(忠萱)[4]이 병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막았다. 웅곡(熊谷)[5]에 이르러 적에게 패하게 되자, 〔병사들을 버리고〕 혼자 말을 타고 되돌아왔으므로[6] 진주(鎭主)로 강등시키고 연진(連珍)[7]을 이벌찬에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겸하여 담당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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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남신현(南新縣) : 본서 권37 잡지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도 기재된 위치 미상의 신라 지방행정단위이다. 본서 권1 신라본기1 파사이사금 5년(84) 5월조 기사의 주석 참조.
- 우두주(牛頭州) : 우수주(牛首州), 수약주(首若州)라고도 하며 지금의 강원도 춘천시 지역이다. 본 기사를 볼 때 일찍부터 신라의 영토에 들어와 있었다고 볼 여지도 있지만, 본서 권35 잡지4 지리2 삭주조에 의하면 선덕왕 6년(637)에 주로 삼고 군주를 두었다고 하므로 우두주라는 이름은 637년 무렵부터 쓰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 이때에 오늘날의 춘천 지역이 신라의 영역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여겨지므로, 이 기사의 사실성에는 의문이 있다. 이 기사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본서 권24 백제본기2 구수왕 9년(222) 10월조에는 우두진(牛頭鎭)으로 적혀있다.
- 이벌찬(伊伐湌) : 신라 경위 17관등 중 제1관등이다.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9년(32)조의 이벌찬에 대한 주석 참조.
- 충훤(忠萱) : 본서 권2 신라본기2 동왕 25년(220) 3월에 이음이 죽자 이벌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때에 백제와의 전투에서 패전한 책임을 물어 좌천되었다.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 웅곡(熊谷) : 본서 권37 잡지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도 실려있는 위치 미상의 지명이다. 지금의 춘천시 동남쪽의 감계(甘溪)로 보는 설,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으로 보는 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설 등이 있다. 본서 권32 잡지1 제사 중사(中祀) 사진(四鎭)조에 나오는 북쪽의 웅곡악(熊谷岳)과의 관련성을 상정하기도 한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3 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72쪽). 웅곡악은 비열홀군, 즉 오늘날의 함경남도 안변군 내의 지역으로 비정할 수 있다.
- 백제군이 … 되돌아왔으므로 : 본서 권24 백제본기2 구수왕 9년(222) 10월조에 같은 내용이 있다.
- 연진(連珍) : 이때에 이벌찬이 된 후 다음 해(224) 7월 백제 봉산을 공격하여 빼앗아서 봉산성을 쌓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다른 행적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