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대 나해이사금(奈解尼師今, AD 196~230) 25년 : 기원후 220년
▶ 충훤을 이벌찬에 임명하다 : 220년 03월(음)
- 二十五年, 春三月, 伊伐湌利音卒, 以忠萱爲伊伐湌, 兼知兵馬事.
- 25년(220) 봄 3월에 이벌찬(伊伐湌)[1] 이음(利音)[2]이 죽어서, 충훤(忠萱)[3]을 이벌찬에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겸하여 담당하게 하였다.[4]
▶ 양산 서쪽에서 열병하다 : 220년 07월(음)
- 秋七月, 大閱楊山西.
- 〔25년(220)〕 가을 7월에 양산(楊山)[5] 서쪽에서 크게 열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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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이벌찬(伊伐湌) : 신라 경위 17관등 중 제1관등이다.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9년(32)조의 이벌찬에 대한 주석 참조.
- 이음(利音) : 나해이사금의 아들로, 생몰년은 ?~220년(나해이사금 25)이다. 형제인 석우로와 함께 군사적 활동을 많이 하였다. 본서 권2 신라본기2 나해이사금 12년(207) 정월조의 이음에 대한 주석 참조.
- 충훤(忠萱) : 이때에 이벌찬에 임명되었으나 2년 뒤인 나해이사금 27년(222) 10월 우두주를 공격해 온 백제와의 웅곡 전투에서 큰 패배를 당하였고, 이에 대한 책임으로 진주(鎭主)로 좌천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 군사에 … 하였다 : 신라 초기에 제1, 2관등인 서불한(舒弗邯)·이벌찬(伊伐湌), 이찬(伊湌)의 임명 기사에 그들에게 군사와 국정운영을 함께 맡겼다는 표현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 기사에서는 군사에 대한 업무만 적혀있지만, 이 당시 이들이 책임을 맡았던 군사와 국정이 엄격히 구분되는 업무 분야는 아니었다고 추정된다. 이찬 등이 관직이 아니므로, 군사와 국정이 이찬 등의 고정적인 직무라 하기는 힘들고, 아직 관직과 관등이 분화하지 않은 상황에서 최고 직위의 역할을 서술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 양산(楊山) : 보통 현재의 경주 남산(南山)에 비정하고 있다. 본서 권1 신라본기1 시조혁거세거서간 즉위년(B.C.57)조의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에 대한 주석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