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8일 월요일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0대 나해이사금(AD 196~230) 19년 : 기원후 214년

10대 나해이사금(奈解尼師今, AD 196~230) 19: 기원후 214

 

강한 바람이 불다 : 21403()

 

  • 十九年, 春三月, 大風折木.[정덕본에는 의 오른쪽 삐침변이 판각되어 있지 않다. 삼국사절요·주자본·을해목활자본에는 으로 되어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도 을 따랐다.]
  • 19(214) 3월에 강한 바람이 불어 나무가 부러졌다.

 

백제가 요거성을 공격하자 이음을 보내 백제 사현성을 격파하다 : 21407()

 

  • 秋七月, 百濟來攻國西腰車城, 殺城主薛夫. 王命伊伐湌利音, 率精兵六千伐百濟, 破沙峴城.
  • 19(214)가을 7월에[1] 백제가 나라 서쪽에 있는 요거성(腰車城)[2]을 공격해 와서 성주(城主)[3] 설부(薛夫)[4]를 죽였다. 왕이 이벌찬(伊伐湌)[5] 이음(利音)[6]에게 명령하여 정예병 6,000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게 하여 사현성(沙峴城)[7]을 격파하였다.

 

천둥이 치다 : 21412()

 

  • 冬十二月, .
  • 19(214)겨울 12월에 천둥이 쳤다.


백제의 장산성 공격을 물리치다 : 21807()

 

  • 二十三年, 秋七月, 武庫兵物自出. 百濟人来國[정덕본에는 으로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주자본·을해목활자본에는 로 되어 있다. 문맥상 가 옳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도 를 따랐다.]獐山城, 王親率兵出, 擊走之.
  • 23(218) 가을 7월에 무기고의 병기가 저절로 나왔다. 백제인들이 공격해와서 장산성(獐山城)[8]을 포위하자, 왕이 직접 병사를 거느리고 나와 백제인들을 공격해 달아나게 만들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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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가을 7월에 : 이 기사에서는 나해이사금 19(214)의 일로 되어있다. 이 해는 백제 초고왕 49년이지만, 본서 권23 백제본기1 초고왕 49년조에는 해당 내용이 없으며, 39(204) 7월 기사에 이 내용이 실려 있다. 어느 쪽이 오류인지 알 수 없다.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서는 백제본기를 따랐다.
  2. 요거성(要車城) : 본서 권37 잡지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도 실려 있는 위치 미상의 성이다. 경상북도 상주시의 옛 요제원(要濟院) 자리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역주, 1996,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50).
  3. 성주(城主) : 당시의 공식적인 직함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신라는 확보한 주요 거점에 성을 쌓고 수비를 위해 군대를 주둔시켰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군대의 지휘관이며 그 거점을 총괄하는 직책이었을 것이다.
  4. 설부(薛夫) : 이 기사에서만 확인되는 인물이다. 본서 권2 신라본기2 벌휴이사금 7(190) 8월조에 나오는 좌군주(左軍主) 설지(薛支)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였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3 주석편(),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71).
  5. 이벌찬(伊伐湌) : 신라 경위 17관등 중 제1관등이다.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9(32)조의 이벌찬에 대한 주석 참조.
  6. 이음(利音) : 나해이사금의 아들로, 생몰년은 ?~220(나해이사금 25)이다. 형제인 석우로와 함께 군사적 활동을 많이 하였다. 본서 권2 신라본기2 나해이사금 12(207) 정월조의 이음에 대한 주석 참조.
  7. 사현성(沙峴城) : 본서 권26 백제본기4 동성왕 12(490) 7월조에 15세 이상 북부인을 동원하여 두 성을 쌓았다는 기록에 나오는 사현성과 동일한 곳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산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는데(金英心, 1997, 百濟 地方統治體制 硏究, 서울大學校 國史學科 博士學位論文, 204), 이곳은 차령을 넘어 공주로 진입하는 통로를 방어하는 요충지이다.
  8. 장산성(獐山城) : 본서 권34 잡지3 지리1 양주(良州)의 영군 중 압량소국(押梁小國)을 취하고 설치하였다고 하는 장산군(獐山郡)과 그 이름이 일치하여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에 있었던 성으로 비정된다. 이곳은 신라 왕경과 서쪽 대구 방면을 잇는 중요 교통로 상의 거점으로, 왕경의 서쪽 방어를 담당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본서 지리지 장산군조에 의하면 제6대 지마이사금대에 압독국을 병합하고 군을 설치하였다고 하므로, 장산성은 이때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본서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3(656)조와 권44 열전4 김인문전에 의하면, 태종무열왕 3(656) 김인문(金仁問)이 당에서 귀국하자 그를 압독주(押督州) 군주(총관)에 임명하여 장산성을 쌓도록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장산성은 훨씬 후대에 축조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하며, 그렇다면 이 기사의 장산성이라는 표현은 후대에 부회된 표현일 가능성도 있다. 이 장산성을 경산 용산산성(龍山山城)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李明植, 1993, 慶山郡 龍山城에 대한 一考察, 中岳志3, 嶺南文化同友會).
  9. 백제인들이 만들었다 : 본서 권24 백제본기2 구수왕 5(218)조에 같은 내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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