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대 나해이사금(奈解尼師今, AD 196~230) 12년 : 기원후 207년
▶ 이음을 이벌찬에 임명하다 : 207년 01월(음)
- 十二年, 春正月, 拜王子利音 或云奈音.爲伊伐湌, 兼知内外兵馬事.
- 12년(207) 봄 정월에 왕자 이음(利音)[1][어떤 글에는 나음(奈音)이라고 되어있다.]을 이벌찬(伊伐湌)[2]에 임명하여, 중앙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겸하여 담당하도록 하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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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이음(利音) : 나해이사금의 아들로, 생몰년은 ?~220년(나해이사금 25)이다. 나음(奈音) 혹은 내음이라 기록된 것도 있다. 형제인 석우로와 함께 군사적 활동을 많이 하였다. 그와 석우로의 관계에 논란이 되는 부분이 있다. 나해이사금 12년(207)에 나해이사금은 왕자 이음을 이벌찬으로 삼아 국정의 중요한 역할을 맡겼고, 이음은 나해이사금대에 여러 군공을 세우는데 그 중 하나가 동왕 14년(209) 소위 ‘포상8국의 난’ 당시 가야를 도와주러 간 것이다. 동왕 14년(209) 7월조에 ‘태자 우로’와 ‘이벌찬 이음’을 파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앞서 이음도 왕자라고 기재된 것을 고려하면 둘 다 나해이사금의 아들로 형제간인 것처럼 보이며, 우로가 태자로 기록되었으므로 그가 형인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삼국유사(三國遺事)』 권제5 피은제8 물계자조에는 ‘태자 이음’과 ‘장군 일벌’이 파견되었다고 하여 이음을 태자로 적시하고 있고, 우로가 이벌찬(서불한)이 된 것이 한참 뒤인 244년인 점을 아울러 고려하여, 이음이 형이고 우로가 둘째라 보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李基東, 1997, 『新羅社會史硏究』, 一潮閣, 24~25쪽).
- 이벌찬(伊伐湌) : 신라 경위 17관등 중 제1관등이다.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9년(32)조의 이벌찬에 대한 주석 참조.
- 중앙과 … 하였다 : 이음보다 앞서 일벌찬이 된 진충의 임명 기사에는 군사에 대한 기술은 없고, 국정 곧 내정에 참여하게 하였다고만 하였다. 이음이 이벌찬이 된 것이 진충이 죽어서인지, 아니면 진충과 동시에 두 명의 이벌찬이 존재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둘의 역할이 구분되므로, 군사와 내정이 분리되어 가는 양상을 반영했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