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0일 일요일

[고구려] 제1대 동명성왕(BC 37~19) 고구려를 건국하다 [기원전 37년]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다 [기원전 37]

삼국사기 권 제13 고구려본기 제1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은 성이 고씨(高氏)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한다. 이에 앞서 부여(扶餘)왕 해부루(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자 산천에 제사를 지내어 대를 이을 자식을 구하였다.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더니 마주 대하며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를 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옮기니 어린아이[小兒]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 모양이었다. ‘(, 개구리)’(, 달팽이)’로 쓰기도 한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바로 하늘이 나에게 후사를 내려주신 것이다.”라고 하며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였다. 그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후에 그 재상 아란불(阿蘭弗)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전에 하늘[]이 저에게 내려와 말하기를, ‘장차 내 자손에게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다. 너희는 그곳을 피하라. 동해 물가에 땅이 있으니 이름을 가섭원(迦葉原)이라 하는데, 토양이 기름지고 오곡(五穀)이 자라기 알맞으니 도읍할 만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란불이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東扶餘)라 하였다. 옛 도읍[舊都]에는 어떤 사람이 있었으니,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으나 스스로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 칭하며 와서 도읍하였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때 태백산(太白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여자를 만났다. 여자에게물으니 말하기를, “저는 하백(河伯)의 딸이고 이름은 유화(柳花)입니다. 여러 동생들과 함께 나가서 놀고 있었는데, 그때 한 남자가 있어 스스로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 저를 웅심산(熊心山) 아래 압록강 인근의 방 안으로 꾀어 사통하고 곧바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제가 중매도 없이 다른 사람을 따라갔다고 꾸짖어 마침내 우발수에서 귀양살이[謫居]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금와가 이를 이상하게 여겨서 방 안에 가두었는데, []가 비추어 유화가몸을 끌어당겨 피하였으나 햇빛이 또 따라와 비쳤다. 그로 인하여 임신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 정도 되었다. 왕이 알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왕이다시 길 가운데에 버렸으나 소나 말이 피하였다. 나중에는 들판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덮어 주었다. 왕이 알을 쪼개려고 하였으나 깨뜨릴 수가 없어 마침내 그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그 어미가 물건으로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남자아이가 껍질을 부수고 나왔는데 골격과 의표(儀表)가 영특하고 호걸다웠다[英奇]. 나이가 겨우 7살이었음에도 영리함이 범상치 않아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에 활을 잘 쏘는 것[善射]주몽(朱蒙)’이라 하는 까닭에 그것으로 이름을 지었다.

금와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어 늘 주몽과 함께 놀았으나 그 재주와 능력이 모두 주몽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 맏아들 대소(帶素)가 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가 아니며, 그 사람됨이 용감합니다.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려우니, 청컨대 그를 제거하시옵소서.”라고 하였다. 그러나왕이 듣지 않고 그에게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주몽이 날랜 말을 알아보고 먹이를 줄여 야위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을 자신이 타고, 마른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들판에서 사냥하였는데, 주몽이 활을 잘 쏘기 때문에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주몽이 잡은 짐승이 매우 많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들이 또 그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주몽의 어머니가 은밀히 이를 알아차리고 주몽에게알려주며 말하기를, “나라 사람들이 장차 너를 해치려 한다.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 어디를 간들 안 되겠느냐? 지체하여 머물다가 욕을 당하는 것보다 멀리 가서 뜻을 이루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였다.

주몽이 이에 오이(烏伊마리(摩離협보(陜父) 등 세 명과 친구가 되어 가다가 엄사수(淹㴲水) 일명 개사수(蓋斯水)라고도 하는데, 지금[고려]의 압록강 동북쪽에 있다.에 이르러 건너려고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추격해오는 병사들이 닥칠까 두려워 물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外孫)이다. 오늘 도망하여 달아나는데 추격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하면 좋은가?”라고 하였다.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주몽이 건널 수 있었다. 이후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지니 추격해오던 기병들은 건널 수 없었다.

주몽이 가다가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 위서(魏書)에는 음술수(音述水)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세 명을 만났다. 그 가운데 한 명은 삼베옷[麻衣]를 입었고, 한 명은 기운 옷[衲衣]를 입었으며, 한 명은 수초로 엮은 옷[水藻衣]을 입고 있었다. 주몽이 묻기를, “그대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가?”라고 하였다. 삼베옷을 입은 사람이 말하기를, “이름은 재사(再思)입니다.”라고 하였고, 기운 옷을 입은 사람이 말하기를, “이름은 무골(武骨)입니다.”라고 하였으며, 수초로 엮은 옷을 입은 사람이 말하기를, “이름은 묵거(默居)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성씨는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주몽이 재사에게 극씨(克氏), 무골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 소실씨(少室氏)라는 성씨를 주고, 무리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하늘의크나큰 명령[景命]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이 세 명의 현명한 사람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께서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 능력을 살펴 각기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 (卒本川)에 이르렀다. 위서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주몽은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자연 지세[山河]가 험하고 단단한 것을 보고 드디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기에 단지 비류수(沸流水)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046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고()를 성씨[]로 삼았다. 혹 말하기를, “주몽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는데, 왕이 아들이 없었다.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라고 하였다. 이때 주몽의 나이가 22세로, ()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B.C. 37),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 갑신년(甲申年)이었다. 사방에서 듣고 와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 땅이 말갈 부락에 잇닿아 있기에 침입과 도적질의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그들을 물리치니, 말갈이 두려워 굴복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왕이 비류수 가운데로 채소잎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있는 것을 알았기에, 사냥을 하며 찾아서 비류국(沸流國)에 도착하였다. 그 나라의 왕 송양(松讓)이 나와서 보고 말하기를, “과인(寡人)이 바다 깊숙한 곳에 치우쳐 있어서 일찍이 군자를 보지 못하였는데, 오늘 서로 만나니 또한 다행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그대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왕이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와서 도읍하였다라고 하였다. 송양이 말하기를, “우리는 여러 대에 걸쳐 왕 노릇을 하였다. 땅이 작아 두 주인을 받아들이기에는 부족하다. 그대는 도읍을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에게 빌붙는 것[附庸]이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분하게 여겨 그와 더불어 말다툼을 하고, 또 서로 활을 쏘아 기예를 겨루었는데[校藝], 송양이 당해낼 수 없었다.

 

  • 동명성왕(東明聖王) :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의 왕호(王號)이다. 본문에 따르면 동명성왕의 재위 기간은 B.C. 37~19년에 이른다. 고구려를 건국하였으며 비류국(沸流國)을 병합하고, 행인국(荇人國)과 북옥저(北沃沮)를 정복하는 등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주력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고구려의 시조에 관한 사료는 크게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①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碑)(414년 건립),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5세기 무렵 작성) 집안고구려비(集安高句麗碑)(4세기 말 이후 건립) 등 당대의 금석문, ② 『위서(魏書)(554년 편찬), 양서(梁書)(629년 편찬), 주서(周書)(636년 편찬), 수서(隋書)(636년 편찬), 북사(北史)(659년 편찬), 통전(通典)(801년 편찬) 등 중국 측 문헌, ③ 『삼국사기(三國史記)(1145년 편찬), 삼국유사(三國遺事)(1281년 편찬)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실린 동명왕편(東明王篇)(1193년 무렵 작성) 등 국내 문헌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가운데 고구려 시조의 왕호를 동명이라 한 것은 으로, 에서는 시조의 이름을 각기 추모(鄒牟)와 주몽이라 하였을 뿐 별도의 왕호를 내세우고 있지 않다. 특히 고구려가 존재하였던 4~5세기 전후한 시기의 금석문()에서는 추모왕(鄒牟王)’ 내지 추모성왕(鄒牟聖王)’이라 하는 등 시조의 이름에 왕호를 덧붙이는 방식을 취하였고, 동명왕(東明王) 내지 동명성왕이라 언급한 국내 문헌()이 고려시대에 편찬되었다는 점은 해당 왕호가 고구려 당대에 존재하였는지에 대해 의문을 자아낸다.
    주목되는 사실은 중국 측 문헌에서 주몽은 고구려의 시조로 나오고 있음에 비해, 동명(東明)은 부여 시조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찬자들이 고구려의 부여의 시조를 각기 주몽과 동명으로 구분하여 인식하였음을 보여준다. 후한 시기 왕충(王充)(27~?)이 쓴 논형(論衡)2 길험편(吉驗篇)과 서진(西晉) 시기 진수(陳壽)(233~297)가 편찬한 삼국지(三國志)30 위서30 동이 부여전(夫餘傳)에 인용된 위략(魏略)(3세기 중엽 편찬)에 이미 부여 시조로 동명이 언급되고 있으므로, 관련 전승이 이른 시기부터 중국에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종래 몇 가지 설이 제기되었다. (1) 동명은 본디 고구려 시조로 그를 부여 시조로 본 것은 문헌의 오류라는 견해가 있으나, 중국 측에서 부여 시조를 동명이라 기록한 시점이 고구려 건국 전승을 인지하기 전이기에 따르기 주저된다. (2) 동명왕 전승은 원래 부여에서 전해져 오던 것이었으나 훗날 고구려가 이를 차용하여 자신들의 건국 신화로 삼았다는 견해가 있는데, 그렇다면 고구려는 성립 이후 상당 기간 자신들의 시조 전승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되어 재고의 여지가 있다. (3) 부여·고구려·백제는 모두 부여계 종족을 중심으로 한 국가로서 동명형(東明型) 신화를 공유하였으며, 이들이 각기 분열·이동하면서 본래의 신화를 변형·재생성하여 갔다고 본 견해이다. 부계(父系)를 하늘로 한 특이한 성혼(聖婚)과 탄생과 시련으로 인한 남천(南遷), 그리고 주력(呪力)에 의한 가교의 성립과 도하(渡河) 및 건국 등에서 보이듯. 부여 동명 전승과 고구려 주몽 신화의 전개 양상은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동일한 서사 구조를 지닌 신화는 동일한 유형의 신화로 간주할 수 있고, 주몽과 동명이 발음상 큰 차이가 없으므로, 양자는 부여계 사회의 전설적 시조를 가리키는 칭호의 발음이나 표기가 지역에 따라 달라진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이상을 보건대 고구려에서 시조는 주몽으로 불리었고, 부여 시조 동명과는 구별되었다. 그런데 후대의 국내 문헌()에서 주몽은 동명성왕으로 전한다. 그러므로 어느 시기에 주몽에게 그러한 왕호가 부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시점에 관해서는 5세기 이후, 장수왕 시기, 5~6세기, 문자명왕 시기, 7세기 초(600) 신집(新集)편찬 시로 설이 엇갈린다.
  • 고씨(高氏) : 고구려 왕실의 성씨. 본서에서는 국호를 고구려라 한 것에서 주몽이 고씨를 칭하였다고 한다. 이후 고구려의 역대 왕들은 모두 고씨였던 것처럼 나온다. 하지만 그와 다른 기록도 존재한다. 삼국유사1 왕력편(王歷篇)에 의하면 제1대 동명왕은 고씨였으나, 2대 유리왕·3대 대무신왕·4대 민중왕을 해씨라 명기하고 있으며, 5대 모본왕도 민중왕과 형제 사이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1 기이 제1 고구려조에서도 찬자는 주몽을 본디 해씨로 보았다[“本姓解也, 今自言是天帝子, 承日光而生, 故自以高爲氏”]. 본서의 경우 성씨를 달리 보지는 않았으나, 대무신왕의 별칭을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으로, 민중왕의 휘를 해색주(解色朱)’, 모본왕의 휘를 해우(解憂)’ 혹은 해애루(解愛婁)’라 칭하는 등 왕호나 왕명(王名)에서 ()’자가 나타난다. 이는 해당 군주들이 본디 해씨였던 흔적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이처럼 고구려 왕실의 성씨를 두 가지, 즉 고씨와 해씨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으므로, 그 이해를 두고 일정한 성과가 축적되었다.
    먼저 애초 고구려는 소노부(消奴部) 해씨 왕실이 집권하는 해씨왕(解氏王) 시대였으나, 태조왕 즉위 이후 계루부(桂婁部)가 왕권을 차지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다음으로 주몽은 실제로 해씨였고 고주몽의 ()’는 형용사의 의미로 모본왕 시기까지는 계루부(桂婁部) 해씨 왕실이 집권하였으며, 태조왕 즉위를 계기로 계루부 내 방계 세력인 고씨가 왕위를 이어가게 되었다고 보기도 하였다.
    그런데 해부루(解夫婁)나 해모수(解慕漱) 등 고구려 건국신화의 부여계 인물들 가운데 자를 쓰는 사례가 있고, 삼국유사2 기이 제2 남부여(南扶餘) 전백제(前百濟) 북부여(北扶餘)조에서는 백제 왕실의 성씨를 해씨라 칭하기도 했거니와[“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解爲氏”], 본서 백제본기에 따르면 해씨는 초기부터 유력 성씨 집단으로 나타나고 있다. 백제 왕실이 부여를 자신들의 뿌리로 여기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부여계 사회에서는 지배 집단이 이름 앞에 자를 쓰는 경우가 존재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는 일정 부분 훗날의 성씨와 같은 기능을 담당하였을 것이며, 고구려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이후 국가 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왕실은 국호에 기인하여 고씨를 칭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태조왕 이후 자의 흔적을 찾기 어려워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시기적 상한은 대략 태조왕 시기로 볼 수 있다.
  • 주몽(朱蒙) : 고구려의 시조이자 건국자로 전한다. 위서를 비롯한 중국 측 문헌에서도 고구려 시조를 주몽으로 표기하였다. 그를 가리키는 표현으로는 주몽 외에 추모’(광개토왕릉비, 모두루묘지, 본서 백제본기,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24 우경제번하(右京諸蕃下) 고려(高麗)), ‘추몽(鄒蒙)’(삼국유사1 왕력편), ‘중모(中牟)’(본서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107월조에 실린 책문(冊文)) 혹은 중모(仲牟)’(일본서기27 천지(天智) 710월조, 그리고 본문에 바로 이어서 나오는 중해(衆解)’ 등이 있는데, 같은 음을 다르게 표기한[同音異表記] 결과로 여겨진다. 본문에 보이듯 주몽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란 의미이다.
  • 부여(扶餘) : 본서 고구려본기에서 주몽이 출자한 것으로 나오는 나라. 그에 따르면 이 부여는 해부루가 왕이었을 때 중심지를 옮겨 동부여가 되었으며, 이후 금와와 대소가 왕위를 이어나갔으나, 대무신왕에 의해 큰 타격을 입고 오래지 않아 멸망한 것처럼 나온다. 다만 본문의 부여가 중국 측 문헌에 언급된, 만주 쑹화강[松花江] 유역을 중심으로 자리하였던 부여(夫餘)와 동일한 실체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중국 측에서는 이 부여의 역사에 대해 상대적으로 상세히 다루고 있음에도 국도(國都)의의 이동을 포함한 본문에서의 관련 기술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본문의 부여가 고구려 건국신화에 등장하므로, 실제 부여와 구분하여 보기도 한다. 그와 관련하여 부여 내부의 어떤 가() 세력 내지 사출도(四出道) 가운데 동쪽 집단을 가리킨다고 보는 설이 참조된다.
    참고로 중국 측 문헌에서 실체가 확인되는 부여의 경우, 1세기에 편찬된 논형2 길험편이나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에 따르면 시조 동명이 북방의 탁리국(橐離國) 내지 고리국(高離國)으로부터 남하하여 건국하였다고 한다. 부여의 원 중심지인 녹산(鹿山)은 현재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린시[吉林市] 일대로 추정된다. 부여는 후한에 직접 조공하고 한 군현과 교류를 이어가면서 안정적인 대외관계를 유지하였고, 만주 지역에서 상당한 세력을 과시하였다. 삼국지30 위서30 동이 부여전(夫餘傳)에 따르면 부여의 영역은 사방 2,000리에 달하였고, ()80,000이었다. 그러나 285년 선비족(鮮卑族) 모용외(慕容廆)의 침략으로 왕 의려(依慮)가 자살하고 도읍이 무너져 1만여 명이 잡혀갔다. 그 뒤 부여는 중심지를 지린성 눙안현[農安縣] 일대로 옮겼지만, 종전의 위세를 회복할 수는 없었다. 346년에는 전연 모용황(慕容皝)이 대규모 병력으로 부여를 침공하였고, 결국 왕 현()을 비롯한 5만여 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이로써 부여는 사실상 붕괴하였으며,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 뒤 부여는 물길(勿吉)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고구려 문자명왕 4(494) 왕실이 고구려에 내부하여 완전히 멸망하였다.
  • 해부루(解夫婁) : 본서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본디 []부여의 왕이었으나 하늘의 계시로 도읍을 옮겨 동부여(東扶餘)를 세운 것으로 전한다. 삼국유사1 기이 제1 북부여조에 인용된 고기(古記)에서는 해부루가 해모수(解慕漱)의 아들이며 성()을 해씨라 하였다고 나온다. 삼국유사1 기이 제1 고구려조에 인용된 단군기(檀君記)에는 단군이 서하 하백의 딸과 관계를 가져 해부루를 낳았다고도 한다. 그래서 삼국유사찬자는 해부루와 주몽을 이복형제 사이로 여겼다. 해부루란 이름은 []’부루=[]’이 결합한 말로써 하늘의 아들[天帝子]를 의미한다는 설도 있다.
  • 곤연(鯤淵) : 동부여 금와왕의 탄생지로 전한다. 제왕운기(帝王韻紀)』 「동명왕편(東明王篇)삼국유사(三國遺事)1 기이 제1 동부여조에서도 동일한 지명이 확인되는데, 그 외에 다른 사료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다. 한편 삼국유사1 기이 제1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왕(赫居世王)조에 따르면 혁거세는 나정(蘿井)에서, 그 부인은 알영정(閼英井)에서 탄생하였고, 천남생묘지명에서는 연개소문 일가 역시 조상이 물에서 태어났다는 전승이 있었다. 이를 보면 신이한 인물이 연못이나 우물 등에서 태어난다는 인식은 널리 퍼져 있었던 것 같다.
  • 금와(金蛙) : 건국신화에 따르면 동부여의 왕으로 후사가 없던 해부루에게 거두어져 왕위에 올랐으며, 주몽은 그의 치세에 부여로부터 도망하였다. 본문에서는 금색 개구리와 같은 외모였기에 금와라 명명되었다 하나, ‘고마혹은 의 음차(音借)라는 설(이병도, 1996,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326)도 있다.
  • 아란불(阿蘭佛) : 부여왕 해부루의 신하로 재상[]의 자리에 있을 때 하늘의 계시를 받아 왕에게 천도를 권유하였다.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그런데 아란불의 아란(阿蘭)’이 부처의 십대 제자 중 하나인 아난(阿難, Ānanda)과 음이 통하므로, 불교 수용 이후 윤색된 인명일 가능성이 있다.
  • 가섭원(迦葉原) : 동부여의 도읍으로 전하는데, 현재 위치를 알 수 없다. ‘가시벌또는 가시부리의 음차(音借)라 한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譯註 三國史記 3-주석편()-, 韓國精神文化硏究院, 402). 그런데 가섭(迦葉)은 부처의 십대 제자인 마하가섭(摩訶迦葉, Mahākāśyapa)을 가리키므로, 불교 수용 이후 윤색된 지명일 가능성이 있다.
  • 동부여(東扶餘) : 해부루가 가섭원으로 천도함에 따라 성립된 부여를 말한다. 동부여에 관한 기록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본문에 나온 동부여로 고구려본기 초기기사에서 등장하며, 대무신왕 시기 멸망하였다고 나온다. 다른 하나는 광개토왕릉비(414)에 나타나는 동부여(東扶餘)로 비문에 따르면 본래 추모왕(鄒牟王) 즉 주몽의 속민(屬民)이었으며, 광개토왕 20(410)에 이르러 재차 복속되었다고 한다. 양자는 사료의 계통이나 시간적 범위를 달리하므로, 동부여의 실상 역시 그에 근거하여 다가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 먼저 주몽에 의해 복속된 북옥저를 동부여로 보거나, 대무신왕 시기 부여왕 대소(帶素)의 아우가 세운 갈사국(曷思國)이 곧 동부여라는 설, 오늘날 지린성[吉林省] 둔화[敦化] 및 옌지[延吉] 일대에 위치한 부여계 세력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동부여 관련 일화는 본서 고구려본기 초기기록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일정한 역사적 사실성을 보여주고 있으나, 그것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 그 결과 본문의 동부여를 국초에 존재하였던 부여의 어떤 가() 내지 사출도 집단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 부여가 285년 선비족 모용외의 침공을 받고 옥저 지역으로 피난한 점에 주목하여, 왕실이 돌아간 뒤에도 그 근방에 남아 있던 잔여 세력이 세운 나라로 보는 견해가 대표적이다. 이는 동부여의 실제 성립 시기를 3세기 후반으로 본 것이다. 그밖에 부여가 중심지를 눙안현[農安縣] 일대로 옮긴 뒤 구도(舊都) 지린시 일대에 남아 있던 세력이 동부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거나(李健才, 2000), 북부여는 쑹넌평원[松嫩平原] 일대에 있던 부여 시조 동명의 고향은 고리국(高離國)이고, 동부여는 지린시[吉林市] 일대에 존재한 부여라고 상정한 설도 제기되었다.
  • 해모수(解慕漱) : 본문에 따르면 해부루가 가섭원으로 떠난 뒤 부여의 원 근거지[舊都]에 나타난 인물이다. 스스로 천제의 아들이라 칭하였으며, 유화와 사통(私通)하였는데, 이후의 행적을 알려주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해모수와 해부루의 관계에 대해 본서에서는 별다른 기술이 없는 것과 달리, 삼국유사1 기이1 1 북부여조에 인용된 고기에는 해부루의 부친으로 나온다.
    해모수에 대해 상세히 전하고 있는 것은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舊三國史)이다. 여기에는 해모수가 오룡거(五龍擧)를 타고 강림하였음과 아울러 아침이면 정사를 듣고 해가 저물면 승천하여 세간에서 천왕랑(天王郞)’이라 일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解慕漱 從天而下 乘五龍車 從者百餘人 朝則聽事 暮則升天 世謂之天王郞”]. 이는 해모수가 신들의 세계에서 인간사에 관여하는 인물로 여겨졌음을 보여주는데, 그러한 면은 단군신화에서의 환웅(桓雄)과 상통한다. 해모수와 결합한 유화를 환웅과 결합한 웅녀에 비정하기도 하나(이병도, 327), 하늘에서 내려온 남성과 지상의 여성이 맺어진다는 모티프는 상당히 보편적인 유형에 속하므로, 지나친 감이 있다.
    참고로 해모수란 이름은 해머슴이란 뜻으로 일월자(日月子)’, 해의 아들을 의미한다는 설이 있다. 아울러 정약용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해모수를 부여 시조 동명과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하였다.
  • 태백산(太白山) : 태백산(太伯山)이라 쓰기도 한다. 백두산, 묘향산, 또는 강원도 태백산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태백산이라는 명칭은 예부터 북방에 있는 대진산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어 여러 산에 비정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묘향산을 태백산으로 여겼다고 한다(고려사58 12 지리2 북계, 안북대도호부 청새진. 이 기사의 무대는 오늘날의 훈 강[渾江], 압록강 일원으로 그 근방의 대표적인 거산(巨山)은 백두산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태백산은 백두산으로 보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한다.
  • 우발수(優渤水) : 오늘날의 백두산 남쪽을 흐르는 하천 중 하나로 보인다. 본서 권37 잡지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삼국사기찬자들도 구체적인 위치를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 하백(河伯) : 하백은 본디 중국의 황허[黃河] 강을 관장하는 수신(水神)으로 포박자(抱朴子)에 따르면 빙이(冰夷) 또는 풍이(馮夷)라고도 불리었으며, 장자(莊子)추수편(秋水篇)이나 산해경(山海經)해내북경(海內北經)에 있는 곽박(郭璞)의 주석에 따르면 사면으로 운거(雲車)를 타며 두 마리의 용을 부린다고 한다. 다만 본문에 나오는 하백이 중국에서 말하는 그 수신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원래는 고구려인들이 따로 부르는 하신(河神)의 이름이 존재하였으나, 중국 문물 수용이 진전됨에 따라 이 하천의 신을 하백이라고 명명하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 유화(柳花) : 주몽의 모친으로 전하는 인물인데, 고구려 존속 당시에 편찬된 위서, 주서, 북사등 중국 측 사서나 광개토왕릉비에서는 각기 하백녀(河伯女)’ 내지 하백여랑(河伯女郞)’이라고 언급되어 있을 뿐이며, 그 이름을 유화로 전하는 것은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및 본서와 삼국유사등 고구려 멸망 이후에 만들어진 국내 문헌에 국한된다. 하백녀와 유화를 별개의 신격으로 파악하기도 하나, 양자 모두 시조모인 이상 그 실체를 다르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용례를 볼 때 고구려 당대에 시조모(始祖母)를 유화라 불렀는지를 확신할 수는 없다. 그 면에 주목하여 고려시대에 고구려 계승 의식 속에 서경(西京), 즉 평양이 중시된 결과, 시조모에게 유화라는 이름이 부여되었다는 추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만주족의 신화와 민속의례에서 버드나무가 지니는 의의가 크며 유화는 해당 수목이 의인화한 것이라는 견해도 제기된 바가 있어 단정하기는 어렵다.
    구삼국사에 따르면 유화는 훗날 주몽이 금와왕의 아들들에게 쫓기여 남쪽으로 피신할 때 오곡의 종자를 주었고, 다시 비둘기로 하여금 보리씨앗[麥子]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시조모 유화는 곡물 경작과 관련된 농경신(農耕神)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본문에 따르면 유화는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이후에도 동부여에서 지내다 동명성왕 14(B.C. 24) 8월 사망하였고, 금와왕은 태후의 예로써 장사지냈다고 한다.
  • 웅심산(熊心山) : 현재 위치를 알 수 없다. 삼국유사1 기이1 1 고구려조에서는 웅신산(熊神山)’으로 나온다. 본문에서는 웅심산 아래 압록강이라고 하여 웅심산과 압록강이 멀지 않은 것처럼 나와 있기에 압록강 중상류 산간지대의 어느 산에 비정할 수도 있다. 다만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에서는 웅심연 가[熊心淵上]에서 놀았다고 하므로 웅심이 연못의 이름일 가능성도 있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譯註 三國史記 3-주석편()-, 韓國精神文化硏究院, 406). 양자를 종합하면 웅심산에 자리한 연못으로 보는 편이 어떨까 한다.
  • 대소(帶素) : 동부여의 왕. 금와의 맏아들로 훗날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고구려와 여러 차례 갈등을 겪다가 대무신왕 5(22) 괴유(怪由)에게 살해당하였다.
  • 오이(烏伊) : 주몽을 도와 고구려 건국을 도운 인물. 본문에 의하면 마리·협보와 함께 주몽을 따라 남하하였다. 중종(中宗) 임신간본(壬申刊本)에는 조이(鳥伊)’라고 하였으나, 본서 권13 동명성왕 6(B.C. 32) 10월조나 삼국유사1 기이 제1 고구려조, 그리고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1 갑신년조에서 오이(烏伊)’라고 하였다. ‘()’()’와 혼동하기 쉬운 자이고, 오이라 칭한 사례가 더 많으므로 오이로 표기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위서100 열전88 동이 고구려전에서 오인(烏引오위(烏違) 등 두 명이 주몽과 함께 남하하였다고 하였는데, 오이와 발음이 비슷하다.
    한편 본서 권23 백제본기1 온조왕 즉위조에 따르면 온조(溫祚)가 졸본부여(卒本扶餘)에서 남하할 때 오간(烏干마려(馬黎) 10명의 신하가 함께하였다고 한다. 이때 오간은 오이와 ()’자를 공유할 뿐 아니라, ‘()’의 자형을 상세히 보지 않으면 ()’으로 혼동할 수 있다. 아울러 마려와 마리 역시 음이 서로 통한다. 그렇다면 이들을 같은 인물의 다른 표기로 볼 수 있다. 다만 오이·마리는 유리명왕 33(14) 8월 양맥(梁貊)을 멸망시키고 한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공략하였다고 하므로 문제가 생긴다. 오이·마리가 오간·마려라면 이미 온조를 따라 남하하여 백제에 있어야 하는데, 고구려에서 활발한 군사 활동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주목되는 것은 부여·고구려·백제 등 부여계 종족을 중심으로 건국되었다고 한 국가에서는 동명형 신화가 공유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건국 과정에서 창업주를 도운 인물에 대한 전승도 포함될 터이므로, 그들의 이름에 대한 표기도 상호 일정 정도의 공통성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즉 이는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신화가 애초 같은 뿌리에서 나왔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본서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동명성왕 6(B.C. 32) 10월 오이는 부분노와 함께 행인국을 치고, 유리명왕 33(14) 8월 마리와 함께 양맥과 한의 군현[高句麗縣]을 공략하는 등 군사 방면에서 큰 업적을 세웠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13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610월조 및 같은 책 유리명왕 33(14) 8월조 참조.
  • 마리(摩離) : 주몽을 도와 고구려 건국을 도운 인물. 본문에 의하면 오이, 협보와 함께 주몽을 따라 남하하였다. 본서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유리명왕 33(14) 8월 오이와 함께 양맥과 한의 군현을 공취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33(14) 8월조 참조.
  • 협보(陜父) : 주몽을 도와 고구려 건국을 도운 인물. 본문에 의하면 오이, 마리와 함께 주몽을 따라 남하하였다. 유리명왕 22(3) 12월 당시 대보(大輔)라는 관직에 있으면서 왕이 정사를 소홀히 한다고 간언하였다가 노여움을 사서 관직을 박탈당하자 남한(南韓)으로 도망하였다고 한다. 본서 권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22(3) 12월조 참조.
  • 엄사수(淹㴲水) : 주몽이 부여를 탈출할 때 건넜다는 강의 이름이다. 본문에서는 엄사수라 하였으나, 광개토왕릉비에서는 엄리대수(奄利大水)’, 동명왕편에서는 엄체(淹滯)[]’, 삼국유사1 기이1 1 고구려조에서는 엄수(淹水)’라고 전한다. 본서 권37 잡지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 나오는 엄표수(淹淲水)도 동일한 하천을 말한다고 여겨진다. 표기 면에서는 문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기본적으로 [·]’자를 공유하고 있다. 한편 위서·북사·수서등 중국 측 사서에서는 구체적인 이름을 말하지 않고 하나의 큰 강[一大水]’이라 하였다. 규모가 제법 큰 하천으로 여겨졌음을 엿볼 수 있다.
    주목되는 점은 부여 시조 동명 전승에서도 비슷한 이름을 지닌 강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동명이 건넌 하천에 대해 논형2 길험편에서는 엄표수(掩淲水)’, 삼국지30 위서30 동이 부여전에 인용된 위략에서는 시엄수(施掩水)’, 후한서85 열전75 동이 부여전 및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174 사이3 동이3 부여국조에서는 엄사수(掩㴲水)’, 양서54 열전48 동이 고구려전 및 북사94 열전82 사이 상 백제전에서는 엄체수(淹滯水)’, 수서81 열전46 동이 백제전에서는 엄수(淹水)’라고 하였다. 이때 위략시엄수엄시수(掩施水)’를 바꿔 표기한 것으로 보면, ‘자를 공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엄사수엄체수등 명칭이 고구려의 경우와 같은 사례도 존재한다.
    종래 주몽이 건넌 엄사수에 대하여 쑹화강[松花江], 훈허[渾河] , 랴오허[遼河] 강 등에 비정하기도 하였으나 주몽이 실재한 강을 건넜다면 부여 시조 동명이 건넌 강과 같을 수 없다. 고구려와 부여의 지리적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실존한 특정 하천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부여와 고구려 지배 집단이 동형(同型)의 건국신화를 지니고 있던 데 기인한 현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굳이 특정 하천으로 볼 필요는 없다. 고구려에서 부여와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위치한 하천을 건국신화에서 말한 엄사수·엄체수 혹은 엄리대수로 여겼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참고로 그 의미를 엄니혹은 엄내로 보아 대수(大水)’와 통한다는 설도 있으나, 그렇게 상정할 경우 엄리대수는 같은 표현이 중복되므로 따르기 주저된다. 아울러 본문에서는 주()를 통하여 개사수(蓋斯水)’라는 다른 이름을 전하고 있는데, ‘()’와 엄사수의 ()’이 의미상 서로 통하는 데 기인한 결과로 여겨진다.
  • 재사(再思) : 주몽이 남하한 뒤 만난 인물. 고구려 개국을 도왔고, ‘()’이라는 성씨를 하사받았다.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주몽은 이때 재사 외에 무골·묵거와도 만났는데, 위서100 열전88 동이 고구려전에서도 이를 언급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세 명이 입은 옷을 말하고 있을 뿐 이름이나 사성(賜姓)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같은 기록에서 오인·오위 등 주몽과 함께 남하한 인물들의 이름은 전하고 있으므로, 애초에는 세 명의 현자를 만났다는 정도의 모티프였다가 이후 이름이 확정되고 사성 전승이 부가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 점은 그들의 이름에서 잘 드러나는데, ‘재차 생각하고[再思]’, ‘강건한 체격을 지녔으며[武骨]’, ‘묵묵히 거처하는 것[默居]’은 지배층에게 요구되는 덕목이기 때문이다.
  • 무골(武骨) : 주몽이 남하한 뒤 만난 인물. 고구려 개국을 도왔고, ‘중실(仲室)’이라는 성씨를 하사받았다.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무골이 받은 중실씨 외에 묵거가 받은 소실씨는 대실(大室)’씨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런데 정작 대실씨는 대무신왕 15(32) 3월조에 나온다. 이는 본문의 사성 전승이 후대에 정리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묵거(默居) : 주몽이 남하한 뒤 만난 인물. 고구려 개국을 도왔고, ‘소실(小室)’이라는 성씨를 하사받았다.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 졸본천(卒本川) : 고구려 초기 중심지인 졸본 근방을 흐르던 하천을 말한다. 다만 이어지는 문장에서는 주몽이 비류수(沸流水) 가에 초막을 지어 살았다고 나온다. 이에 비류수 가운데 졸본 지역을 흐르던 특정 구간을 지칭한다고 보기도 한다.
  • 흘승골성(紇升骨城) ; 흘승골성(紇升骨城)위서100 열전88 동이 고구려전에서 고구려가 처음 도읍한 곳으로 나오며, 이후의 중국 측 사서 역시 그러한 기술을 답습하고 있다. 광개토왕릉비에서는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於沸流谷, 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고 하였는데, 홀본이 곧 졸본(卒本)이므로 여기서 언급한 성채가 바로 중국 측에서 말한 흘승골성으로 여겨진다. 이에 대해 흘승골승흘골(升紇骨)’이 전도된 것으로 여겨 승흘골=솔골[卒忽]=졸본으로 파악하기도 하나, 자순(字順)을 뒤바꾸는 등 자의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흘승골성흘본골성(紇本骨城)’의 오사(誤寫)로 보기도 한다. 글을 옮겨 적는 과정에서 ()’()’으로 잘못 베껴졌을 가능성도 충분하고, ‘흘본(紇本)’은 홀본과 음이 통하기 때문에 일견 타당하다. 그렇다면 흘본골성=홀본(졸본)의 골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에서는 검은 구름이 골령(鶻嶺)에 일어나더니 성곽이 만들어져 주몽이 그곳에서 거처하였다는 전승을 전한다. 이는 광개토왕릉비에서 홀본 서쪽 산 위에 세웠다는, 위서고구려전에서 말한 흘승골성과 다르지 않다고 여겨지는데, 그 면에서 보자면 흘승골성이란 이름에 골령이라는 지명이 함께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의 음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보자면 골령 자체가 홀본의 산봉우리[山嶺]’를 의미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한편 오녀산의 지정학적 특징에 주목하여 흘승골성을 성 같은 산 위의 성이란 의미로 이해하기도 한다.
    오늘날 연구자들 대부분은 흘승골성을 랴오닝성[遼寧省] 환런[桓仁] 지역에 있는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본다. 이 산성은 환런 일대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장소에 자리하고 있어 지배자의 권력을 드러내기에는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실제 오녀산은 해발 820m 높이에 서··북쪽 삼면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상은 남북 1,000m, 동서 300m, 2,440m에 이르는 넓은 평탄지이다. 현재 동쪽과 동남쪽 산허리에는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쌓은 고구려 때의 성벽이 남아 있고, 산 정상부에서는 고구려시기의 여러 건물 유지와 저수 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 비류수(沸流水) : 고구려 초기 중심지를 흐르는 하천. 본서 권14 고구려본기 제2 대무신왕 4(21) 12월조에서는 부여 정벌 시 고구려군의 이동 경로 중에 언급되고 있으며, 삼국지30 위서30 동이 고구려전에 따르면 이이모(伊夷模)와의 왕위 계승 전쟁에서 패배한 발기(拔奇)와 연노부(涓奴部) 세력이 거주한 곳이기도 하며[“拔奇怨爲兄而不得立, 與涓奴加各將下戶三萬餘口詣康降, 還住沸流水”], 같은 책 권28 위서28 관구검전에서는 조위(曹魏)의 침공에 대한 고구려군의 진군 경로 상에서 등장한다[“正始中, 句驪王宮將步騎二萬人, 進軍沸流水上, 大戰梁口”]. 본서 권37 잡지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도 기재된 것으로 보아 본서의 찬자도 그 위치를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훈장[渾江] 강에 비정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나, 그 지류인 푸얼강[富爾江]으로 보기도 한다(노태돈, 2012, 고구려초기 천도에 관한 약간의 논의, 한국고대사연구68, 29).
  • 고구려(高句麗) :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를 다룬 중국 측 사서, 한서·후한서에서는 고구려(高句驪)라 쓰기도 하였다. ‘()’ 대신에 ()’ 부수의 ()’를 쓴 것은 중국 측에서 이질적인 공동체를 가리킬 때 종종 쓰던 비칭(卑稱)의 일환이다. 다만 삼국지단계에서부터는 ()’자 부수를 뺀 명칭이 사용되었다. 물론 송서양서등의 남조계 사서에서는 여전히 이전의 표기를 유지하기도 하였으나, 위서등 북조계 사서에서는 삼국지의 흐름을 이어받았다.
    고구려는 ()’를 뺀 채 구려(句麗)’ 내지 구려(句驪)’라 칭해지기도 하였다. 이때의 구려는 구루(溝樓)’와 마찬가지로 성읍(城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는 크다는 뜻이므로, 결국 고구려는 대성(大城)’·‘수읍(首邑)’·‘상읍(上邑)’과 같은 의미라고 보기도 한다.
    한편 주서단계 이후로는 고구려를 고려(高麗)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전에는 고구려와 고려가 상통하여 사용된 것으로 보아왔으나, 고구려가 광개토왕 혹은 장수왕 시기에 고구려에서 고려로 국명을 바꾼 것으로 파악한 설이 제기되어 공감대를 얻고 있다. 사실 백제국(佰濟國)이 백제(百濟)가 되고, 사로국(斯盧國)이 신라(新羅)가 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 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국호를 원래의 의미나 발음에서 동떨어지지 않는 선에서 개정하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고구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고려는 글자의 의미에서 고구려보다 세련된 인상을 주므로, 5세기 이후에는 고려가 정식 국호로 사용되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 졸본부여(卒本扶餘) : 분주를 통하여 본문의 고구려 건국신화와 색채를 달리하는 전승을 소개하는 가운데 나오는 지명이다. 그런데 졸본부여는 본서 고구려본기 분주에서만 언급될 뿐 본문에 등장한 적은 없다. 따라서 그 실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먼저 삼국유사1 기이 제1 고구려조에서 찬자는 고구려를 졸본부여로 이해함과 아울러, 부여 동명신화를 고구려 건국신화로 간주하며 분주를 통하여 졸본부여가 북부여의 별도였기에 주몽을 부여왕이라 하였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는 졸본부여를 고구려로 본 것이다. 그런데 본문 분주의 내용은 주몽이 도착하기 전에 그 지역에는 졸본부여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것이므로, 따르기 주저된다. 이밖에 졸본부여가 실재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런데 졸본부여가 분주가 아니라 본문에 언급된 것은 오히려 본서의 백제본기다. 이로 보아 고구려본기 분주에서 다룬 내용은 백제본기의 내용을 간략히 언급한 것으로 여겨진다. 주목되는 점은 백제본기에 의거할 경우 주몽은 사위로 졸본부여의 왕위를 이었을 따름이고, 온조와 비류의 남하 당시 오간·마려 등 졸본부여의 신하들이 동행하는 것에서 볼 때, 주몽의 역할은 제한적이고 백제는 졸본부여의 후계 국가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따라서 졸본부여라는 개념은 백제 관련 전승의 범주에서 이해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한다. 이에 졸본부여는 백제인들이 북부여·남부여(백제)와 구분되는 또 다른 부여로서 고구려를 개념화한 것이거나, 백제와 부여의 계통을 직접 연결짓고자 하는 목적에서 설정된 가상의 존재로 보는 설이 제기되었다.
  • 말갈(靺鞨) ; 한반도 동북부 및 만주 동부 지역, 즉 오늘날의 쑹화강[松花江무단강[牡丹江헤이룽강[黑龍江] 강 및 두만강 유역에 거주하였던 종족이다. 그런데 말갈이라는 이름은 북제서7 본기7 무성제(武成帝) 하청(河淸) 2(563) 시세조(是歲條)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본문이 대상으로 한 시기에 말갈이라는 집단의 존재를 상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당시 만주 동부 및 한반도 동북부에 거주하였던 집단으로 나타나는 것은 숙신(肅愼) 내지 읍루(挹婁)이다. 따라서 이는 본디 숙신이나 읍루를 말한 것이며, 후대에 사료를 정리·보완하는 과정에서 말갈로 개칭된 것 같다. 여러 상황을 고려할 때 국초 고구려의 말갈 복속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구당서199하 열전149하 북적 말갈전에 따르면 말갈 일부 세력은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고, 실제 수·당과의 전쟁 과정에서 말갈인들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광개토왕릉비에서 광개토왕 영락 8(398) 굴복시킨 백신(帛愼)이 숙신이라면, 영향력을 행사한 시기적 상한은 더욱 올려볼 수 있다. 이 기사에 일정한 역사적 사실이 자리하고 있다고 볼 경우, 국가 성립기에 숙신이나 읍루의 침공을 받았던 경험이 말갈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6세기 후반 이후 윤색·정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통설에 따르자면 말갈은 진한시대에 숙신(肅愼), 위진시대에 읍루(挹婁), 북위시기에 물길(勿吉)이라 불리었던 집단이 그 전신이며, 송대 이후의 여진(女眞)이 그 후신이다. 숙신-읍루-물길-말갈-여진의 선후 관계가 이루어진다. 다만 그와는 달리 이들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부정하는 견해도 제기되었으며(韓圭哲, 41~44),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살던 반농반렵(半農半獵) 종족들 가운데 각 시기에 두드러진 활동을 한 집단이 기록에 남겨진 결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수서81 열전46 동이 말갈전에 따르면 당시 말갈에는 백산부(白山部속말부(粟末部백돌부(伯咄部안거골부(安車骨部불녈부(拂涅部호실부(號室部흑수부(黑水部)7개 집단이 존재하였으며, 단일한 국가 공동체를 성립하지 못한 채 부락 내지 집단별로 중국 왕조와 고구려에 복속되어 지냈다.
  • 비류국(沸流國) : 주몽 집단에 앞서 졸본 일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공동체. 이 기사에 따르면 비류국은 주몽이 졸본에 오기 전에 누대에 걸쳐 이 일대에 지배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그 왕 송양은 주몽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끝에 결국 투항하였고, 주몽은 그를 다물도(多勿都)의 우두머리[國主]로 삼았다. 이는 선주(先住) 세력이 계루부가 주도하는 고구려의 일원으로 편제되었음을 반영한다. 본서 고구려본기에서는 이후 비류부(沸流部) 혹은 비류나부(沸流那部)라 일컫는 부() 집단이 나오는데, 이들이 바로 비류국의 후신이다. 즉 훈 강[渾江] 유역의 소국[那國]들이 계루부 중심의 정치 공동체에 편입되어 나부(那部)가 된 구체적인 사례로, 이후 중국 측 사료에 보이는 소노부(消奴部) 내지 연노부(涓奴部)가 바로 비류나부이다.
  • 송양(松讓) : 비류국의 왕이다. 본문에 따르면 그의 가문은 누대에 걸쳐 비류수 일대에서 왕 노릇을 하였으나 동명성왕 원년(B.C. 37) 주몽과의 대결에서 패배하였고 이듬해인 동명성왕 2(B.C. 36) 6월 나라를 들어 주몽에게 투항하였다. 송양의 이 고구려어에서 땅을 뜻하는()’()’등과 통한다고 여겨, 특정 인명이 아니라 소노부(消奴部)를 뜻하는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359~362).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25대 진지왕(眞智王, AD 576~579) 4년 : 기원후 579년

제 25 대 진지왕 ( 眞智王,  AD 576~579) 4 년 : 기원후 579 년   ▶ 백제가 성을 쌓아 길을 막다 : 579 년 02 월 ( 음 )   四年 , 春二月 , 百濟築熊峴城 · 松述城 , 以梗䔉 山城 · 麻知峴城 · 內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