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리누스(Macrinus, 217~218)
- 로마 제국의 제22대 황제
- 재위 : 217년 4월 11일 ~ 218년 6월 8일
- 출생 : 164년 경
- 사망 : 218년 6월
마크리누스는 로마 제국의 22대 황제로 황제에 올랐음에도 단 한번도 수도 로마에 들어가지 못한 유일한 황제이다.
[164년]
마우레타니아 해안의 항구 도시 카이사레아 (현 셰르셸)에서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마크리누스는 대개의 베르베르 혈통 무어인답게 귀 한쪽에 귀걸이를 뚫었던 것으로 유명했다.
플라우티아누스 밑에서 당시 로마 지도층과 인연을 맺게 되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아래에서 행정관료 자리를 임명받아 출세를 시작했다. 그런데 마크리누스를 신뢰해 그를 이끌어준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플라우티아누스와 견원지간이었던 공동황제 카라칼라였다.
[212년]
마크리누스는 카라칼라의 신임 아래 승승장구를 계속했고, 212년에는 근위대장에 임명돼 동부에서 군사원정과 여행을 병행하던 카라칼라를 직접 모셨다.
[217년]
원로원 출신이 아닌 최초의 황제로 카라칼라가 217년 파르티아와 싸우다가 장교들에게 암살당하자 재위에 올랐다.
기번으로 대표되는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무렵 카라칼라가 폐위되고 마크리누스가 제위를 계승할 것이라는 예언이 나돌았다고 한다. 이는 카라칼라의 신임을 받고 있는 마크리누스를 크게 동요케 했고,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그래서 마크리누스는 자신의 목숨과 안위를 위해 예언만으로도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해 잔인하게 죽일 카라칼라를 살해하기로 결심했다. 이 계획은 은밀하게 진행됐고, 계획대로 217년 카라칼라는 루나 신전 침배 중 암살됐다. 이때 마크리누스는 당시 행군 중인 로마군의 추대를 받아 제위에 올랐다.
- 마크리누스는 카이사레아 출신의 무어인으로 아주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따라서 그를 정신력으로 궁정까지 올라간 나귀에 비유하는 것은 아주 적절해 보인다. 특히 그는 무어인들의 관습에 따라 한쪽 귀를 뚫었다. 출신 등에서 오는 이러한 약점은 그의 강직한 성품에 가려졌다. 그러나 법과 판례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보면 법조문 등을 충실하게 따르기는 했지만 이에 대한 지식은 정확하지 않았다.
ㅡ 디오 카시우스 79. 11
[218년] 파르티아와의 굴욕적인 강화
파르티아인들은 1년 전 카라칼라의 공격에는 대비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217년 가을까지 강력한 군대를 규합한 뒤 많은 병력을 이끌고 로마의 기지로 진군해왔다. 이는 과거 트라야누스 황제가 개전 초기 뛰어난 전공을 세우고 승기를 잡다가, 파르티아의 반격으로 무너진 모습과 묘하게 겹쳤다. 이때 두 진영은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니시비스에서 충돌해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이 사건이 바로 니시비스 전투인데, 어느 쪽도 우세를 차지하지 못했고 마크리누스는 여기에서 인생 최악의 실수를 범한다. 제위를 차지한 지 얼마 안 된 터라, 그는 파르티아 왕중왕 아르타바누스 4세에게 카라칼라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며 2억 세스테르티우스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점령한 영토들을 포기하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218년 평화 조약을 체결하면서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포기하고 볼모로 잡고 있던 파르티아 국왕의 어머니와 배상금, 그때까지 손에 넣은 전리품들을 모두 반환했다.
[바리우스 아비투스(엘라 가발루스)의 등장]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가짜 안토니누스’가 나타났다. 그는 율리아 돔나의 여동생 율리아 마이사(Juila Maesa)의 외손자인, 엘라가발루스로 더 잘 알려진 14살의 바리우스 아비투스였다. 마크리누스의 철저한 대비에도 율리아 마이사는 20년 세월 동안 쌓아둔 로마 제국 전역의 인맥을 동원해 연락을 취했고, 친정이 있는 에메사 왕가의 남은 재산을 올인해 재기의 도박을 벌였다. 때마침 언니 돔나가 자살 전, 카라칼라 측근 및 충성스러운 병사들과 공모하면서 판이 어느 정도 마련됐다는 점, 이 문제로 마크리누스가 로마로 가지 못하고 강제로 안티오키아에 머물게 된 점도 율리아 마이사 입장에선 기회였다. 더욱이 로마에 동결된 세베루스 왕조의 모든 재산을 되찾을 생각이라면, 마이사와 두 딸에게 토착 왕가로 에메사 일대에서 오래 부를 쌓아 둔 시리아 일대의 재산은 아깝지 않았다.
[마크리누스의 최후]
218년 5월 15일 밤, 소규모의 추종자 무리가 율리아 마이사와 섹스투스 바리우스 아비투스를 에메사 근처의 라파나이아(Raphanaea)에 있는 제3군단 ‘갈라카’ 병영으로 몰래 데리고 갔다. 다음 날 아침 군인들이 그를 황제로 추대하고 공개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아비투스가 정말로 카라칼라의 사생아라는 소문에 특히 열광적이었는데, 왜냐하면 카라칼라는 이전의 콤모두스와 마찬가지로 군대 내에서 인기가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마크리누스는 아홉살 난 아들 디아두메니아누스(Diadumenianus)를 아우구스투스 직위에 올림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 했다. 그는 이를 기회로 병사들에게 하사금을 나눠주며 그들의 신임을 다시 얻어보려 했지만, 대세는 이미 정해진 상태였고 결국 그는 안티오키아로 달아나야 했다.
218년 6월 8일, 마크리누스는 안티오키아 외곽에서 반란군들에게 패한 후 로마에서 지원군을 규합하겠다는 희망을 갖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그는 발각되지 않으려고 수염과 머리를 다 밀었지만, 결국 정체가 탄로났고 보스포루스를 건너려고 기다리던 중에 칼케돈(Chalcedon)에서 체포되었다. 거의 같은 시각에 그의 아들 역시 시리아 국경에 있는 제우그마에서 파르티아로 달아나려다가 체포되었다. 마크리누스는 감시를 받으며 남으로 이송되다가, 카파도키아(Cappadocia)에 있는 아르켈라이스(Archelais)에서 백인대장에게 처형되었다. 그의 나이 53세 때였다. 결국 그는 황제로서 로마는 고사하고 유럽 대륙에 발조차 못들인채 죽음을 맞이하였으며 그렇게 세베루스 왕조는 지속되게 된다.
[가족관계]
- 배우자 : 노니아 켈사
- 자녀 : 디아두메니아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