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대 혁거세 거서간(赫居世 居西干, BC 57 ~ AD 4) 17년 : 기원전 41년
6부를 순행하다 : 기원전 41년
==========
十七年, 王巡撫六部, 妃閼英從焉. 勸督農桑, 以盡地利.
==========
17년(B.C. 41)에 왕이 6부(六部)[1]를 돌면서 백성들을 살폈는데, 왕비 알영(閼英)[2]도 왕을 따라갔다. 농사와 양잠을 권하고 독려하여 땅이 주는 이로움을 다 얻도록 하였다.
==========
[각주]
- 6부(六部) : 알천 양산촌을 비롯한 6촌을 ‘6부’로 표현하였다. 이미 혁거세거서간 즉위조에서 6촌을 ‘진한 6부’라고 표현하여 6촌과 6부를 동일한 실체로 보는 시각이 나타난 바 있는데, 본 기사에서도 마찬가지의 인식이 드러난다. 그렇지만 ‘6촌’과 ‘6부’는 실체가 다를뿐더러 계승 관계 역시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이해이다. 6부의 실제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이사금 시기에 6부가 모두 갖추어졌을 것으로 보는 설(李文基, 1980; 姜鳳龍, 1991; 全德在, 1996)과 이사금 시기에는 3개의 집단으로 있던 것이 마립간 시기에 분화 또는 재편되어 6부를 이루었다고 추정하는 설(朱甫暾, 1992; 강종훈, 2000) 등으로 대별된다.6부는 상고기에 신라 국가를 구성하는 정치체로 존재하다가 중고기에 들어가 법흥왕 대에 율령의 반포, 불교의 공인, 상대등의 설치 등을 거치며 정치적 기능을 거의 상실한 것으로 보이고, 통일기 이후에는 왕경의 행정구역으로서의 의미만을 지니는 것으로 변화했다고 파악되는데(전덕재, 1996),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본 기사 등에서 ‘6부’가 언급된 것은 그것이 정치 단위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던 시기의 기억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본 기사의 원전이 되는 자료는 통일기 이전, 좀 더 구체적으로는 진흥왕 초반 ‘국사(國史)’가 편찬될 때 작성된 것으로부터 유래되었을 가능성도 상정된다.〈참고문헌〉李文基, 1980, 「新羅 中古의 六部에 관한 一考察」, 『歷史敎育論集』 1姜鳳龍, 1991, 「新羅 上古期 中央政治體制의 基本原理와 ‘部’」, 『李元淳敎授停年紀念歷史學論叢』, 서울대 역사교육과朱甫暾, 1992, 「三國時代의 貴族과 身分制」, 『韓國社會發展史論』, 一潮閣全德在, 1996, 『新羅六部體制硏究』, 一潮閣강종훈, 2000, 『신라상고사연구』, 서울대출판부
- 알영(閼英) : 알영은 그 이름에 김씨의 시조로 전하는 ‘알지(閼智)’의 ‘閼’을 포함하고 있어, 애초에 김씨 족단에 속한 인물일 것으로 추정된다(金哲埈, 1952, 「新羅 上代社會의 Dual Organization(상)·(하)」, 『歷史學報』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