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대 혁거세 거서간(赫居世 居西干, BC 57 ~ AD 4) 19년 : 기원전 39년
변한이 항복하다 : 기원전 39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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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九年, 春正月, 卞韓以國來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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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B.C. 39) 봄 정월에 변한(卞韓)[1]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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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변한(卞韓) : 『삼국지』 권30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한조에는 ‘변진(弁辰)’으로 나오며, ‘馬韓’, ‘辰韓’과 더불어 삼한의 하나라는 의미로 ‘弁韓’으로도 표기되어 있다. ‘弁辰’이라는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애초에 진한과 밀접한 관계를 지녔을 것인바, 『삼국지』에서는 진한과 ‘잡거(雜居)’하며 의복과 거처는 진한과 같았고, 언어와 법속 역시 진한과 비슷하지만 귀신을 섬기는 것이 다르다고 기록하였다. 대체로 낙동강 하류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금의 경상남도 일대에 산재했던 소국들의 연합체로서, 가야연맹체로 이어지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편 애초의 표기인 ‘弁韓’ 대신 같은 음의 다른 글자인 ‘卞韓’으로 기록된 것은 7세기 중엽인 649년에 편찬된 『속고승전(續高僧傳)』(일명 『당고승전』)의 권13 의해9에 실린 원광(圓光)전과 같은 책 권24 호법하에 실린 자장(慈藏)전에서 처음 확인된다. 이후 신라말에 최치원이 지은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에서 “伏聞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髙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삼국사기』 권46 열전6 최치원)라고 하여 ‘卞韓’이라고 표기했고, 이것이 선례가 되어 『삼국사기』에서는 일괄적으로 ‘弁韓’ 대신 ‘卞韓’으로 기록되었다. 최치원이 변한을 백제와 연결시킨 것은 사실과는 동떨어진 오해였다. 조선 초기에는 권근(權近)이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지으면서 ‘변한은 곧 고구려’라고 하여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오해들은 17세기 초에 한백겸이 『동국지리지』를 통해, 변한은 백제나 고구려와는 관계없고 신라와 더불어 경상도에 남북으로 위치했던 가야로 이어진다는 주장을 하면서 마침내 불식되었다(盧泰敦, 1982, 「三韓에 대한 認識의 變遷」, 『韓國史硏究』 38, 154~155쪽). 참고로 12세기 초에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이 지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도 권6 궁전2 별궁조에 당시 고려의 왕족들이 거처한 곳의 하나로 ‘변한궁(卞韓宮)’의 존재가 확인되는데, 이를 통해 고려 시대에는 ‘弁韓’보다는 ‘卞韓’이라는 표기가 일반적이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盧泰敦, 1982, 「三韓에 대한 認識의 變遷」, 『韓國史硏究』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