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대 진흥왕(眞興王 AD 540~576) 9년 : 기원후 548년
▶ 고구려가 백제를 침입하자 도와주다 : 548년 02월(음)
- 九年, 春二月, 高句麗與穢[정덕본 穢, 을해목활자본에는 濊로 되어 있다.]人攻百濟獨山城, 百濟請救. 王遣將軍朱玲[《삼국사기》 권26 성왕(聖王) 26년조 및 《동국사략》·《삼국사절요》에는 珍으로 되어 있다.], 領勁卒三千擊之, 殺獲甚衆.
- 9년(548) 봄 2월에 고구려가 예인(穢人)[1]과 함께 백제의 독산성(獨山城)[2]을 공격하자, 백제가 구원을 요청하였다.[3] 왕이 장군 주령(朱領)[4]을 보내 정예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공격하게 하니,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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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예인(穢人) :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던 동예인을 가리킨다. 본서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4년(548) 정월과 권제26 백제본기제4 성왕 26년(548) 정월조에는 ‘예(濊)’라고 표기되어 있다. 종래에 이 기사를 근거로 하여, 신라본기 초기 기록에 보이는 말갈(靺鞨)의 실체가 동예(東濊) 또는 예족(濊族)이라고 주장하였다(盧泰敦, 1997, 「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고구려관계 기사 검토」, 『경주사학』 16).
- 독산성(獨山城) :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9 흠명천황(欽明天皇) 9년(548) 4월조에 고구려 군대가 백제의 마진성(馬津城)을 포위한 사건이 전한다. 본서 권제37 잡지제6 지리4 도독부 13현 지심주조에 “마진성은 본래 고산성(孤山城)이었다.”고 전하는데, 고산(孤山)과 독산(獨山)은 뜻이 통하므로 둘은 동일한 지명을 가리키는 이표기(異表記)라고 볼 수 있다. 본서 권제36 잡지제5 지리3 웅주 임성군조에서, “고산현(孤山縣)은 본래 백제 오산현(烏山縣)으로 경덕왕 때에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의 예산현(禮山縣)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마진현, 즉 고산현은 현재 충남 예산군 예산읍으로 비정할 수 있고, 독산성(獨山城) 역시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金泰植, 285쪽). 다만 본서 권제26 백제본기제4 성왕 26년(548) 정월조에는 ‘한강 북쪽 독산성[漢北獨山城]’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 475년 웅진천도 이후에도 백제가 계속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백제인이 일부러 ‘한북(漢北)’이라는 표현을 추가하여 부회하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전덕재, 2016; 2018, 447~448쪽).〈참고문헌〉金泰植, 1993, 『加耶聯盟史』, 一潮閣전덕재, 2016, 「 『三國史記』百濟本紀 記錄의 基本原典과 改撰」, 『역사와 담론』 80전덕재, 2018, 『三國史記 본기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 고구려가 예인(穢人)과 … 요청하였다 : 본서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4년(548) 정월조에는 “예(濊)의 군사 6천 명으로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다.”라고 전하고, 본서 권제26 백제본기제4 성왕 26년(548) 정월조에는 “고구려왕 평성(平成: 양원왕)이 예(濊)와 모의하여 한강 북쪽[漢北] 독산성을 공격하였다.”라고 전한다. 즉 신라본기에서는 548년 2월에,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에서는 548년 정월에 고구려가 백제 독산성을 공격하였다고 전하여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한편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9 흠명천황(欽明天皇) 5년(544) 11월조에 백제 성명왕(聖明王: 성왕)이 안라(安羅)와 대가야(大加耶) 및 왜 등과 연대하여 신라의 가야지역 진출을 저지할 수 있는 세 가지 계책을 제시한 내용이 보이는데, 이 가운데 첫 번째가 신라와 안라 사이에 위치한 대강수(大江水: 낙동강과 남강의 합류지점)를 차지하여 그 근처에 위치한 6성을 고쳐 쌓은 다음, 각 성마다 왜군 500명씩 배치하고, 낙동강 서안의 구례산(久禮山)에 주둔한 신라군을 압박하여 스스로 항복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544년 이후 백제가 왜에 사신을 파견하여 파병을 요청하자, 이에 대해 548년 1월에 왜가 파병을 약속하였다. 안라는 백제가 대강수를 차지하고 신라군을 낙동강 서안의 구례산에서 축출한 후에 자신들을 강하게 압박하리라고 예상하여, 고구려에게 백제를 공격하여 달라고 권유하였는데, 이에 고구려가 마진성(독산성)을 공격하였다고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었다(金泰植, 1993, 『加耶聯盟史』, 一潮閣, 283~289쪽).
- 주령(朱領) : 본서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4년(548) 정월과 본서 권제26 백제본기제4 성왕 26년(548) 정월조에는 주진(朱珍)으로 전한다.
- 왕이 장군 주령(朱領)을 … 매우 많았다 : 본서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4년(548) 정월조에는 신라 장군 주진(朱珍)이 와서 백제를 구원하여 고구려 군사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고 전하고, 본서 권제26 백제본기제4 성왕 26년(548) 정월조에는 신라왕이 장군 주진(朱珍)에게 명령하여 갑옷 입은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으며, 주진이 밤낮으로 길을 가서 독산성 아래에서 고구려 군사와 한번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고 전한다. 신라본기와 고구려본기, 백제본기의 내용이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살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