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대 진흥왕(眞興王 AD 540~576) 6년 : 기원후 545년
▶ 국사를 편찬하다 : 545년 07월(음)
- 六年, 秋七月, 伊湌異斯夫奏曰, “國史者, 記君臣之善惡, 示褒貶於萬代. 不有修撰, 後代何觀.” 王深然之, 命大阿湌居柒夫等, 廣集文士, 俾之修撰.
- 6년(545) 가을 7월에 이찬(伊飡) 이사부(異斯夫)[1]가 아뢰기를, “국사(國史)라는 것은 임금과 신하의 선악(善惡)을 기록하여 잘잘못[褒貶]을 만대(萬代)에 보이는 것입니다. 〔이를〕 편찬하지 않으면, 후대에 무엇을 보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진실로 그렇다고 여기고, 대아찬(大阿飡) 거칠부(居柒夫)[2] 등에 명하여, 널리 문사(文士)를 모아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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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이사부(異斯夫) : 이사부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지증마립간 6년(505) 2월조 참조.
- 거칠부(居柒夫) : 신라의 장군이자 상대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중대에 황종(荒宗)이라고 고쳐 불렀다. 성은 김씨(金氏)이고, 나물왕(奈勿王) 5대손이다. 할아버지는 각간(角干) 잉숙(仍宿)이고, 아버지는 이찬(伊飡) 물력(勿力)이다. 일반적으로 잉숙은 본서 권제3 신라본기제3 소지마립간 즉위년(479)조에 소지왕비 선혜부인(善兮夫人)의 아버지로 전하는 이벌찬(伊伐飡) 내숙(乃宿), 소지마립간 8년(486) 2월조에 이벌찬으로 삼아 국정에 참여케 하였다고 전하는 내숙(乃宿)과 동일인으로 이해하고 있다. 법흥왕 11년(524)에 건립된 「울진 봉평리 신라비(蔚珍 鳳坪里 新羅碑)」에 아버지 물력(물력지(勿力智))이 일길간지(一吉干支: 일길찬)였다고 전한다.거칠부는 젊었을 때에 승려가 되어 고구려에 몰래 들어가 혜량법사(惠亮法師)의 강경(講經)을 듣고 친교를 맺었다. 진흥왕 6년(545)에 문사(文士)를 모아 『국사(國史)』의 편찬을 주도하였고, 진흥왕 12년(551)에 고구려의 한강유역을 공격할 때에 장군으로 참여하였다. 진지왕 원년(576)에 진지왕의 즉위와 동시에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그 이후 얼마 안 있어 78세에 사망하였다. 진흥왕 22년(561)에 건립된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에 일척간(一尺干: 이찬)으로서 진흥왕이 창녕지역을 순행할 때에 시종(侍從)하였다고 전하고, 진흥왕 29년(568)에 건립된 「마운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磨雲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와 「황초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黃草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에서는 대등(大等)이자 이간(伊干)으로서 진흥왕이 마운령과 황초령을 순행할 때에 시종하였다고 하였다.〈참고문헌〉전덕재, 2014, 「異斯夫의 家系와 政治的 位相」, 『史學硏究』 115朱甫暾, 2014, 「거칠부의 出家와 出仕」, 『韓國古代史硏究』 76
- 널리 문사(文士)를 모아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 일반적으로 진흥왕 때에 제도와 문물의 정비에 따라 현실의 김씨 왕실의 정통성을 천명하고, 나아가 유교적인 정치이념에 입각하여 왕자(王者)의 위엄을 내외에 과시하기 위하여 『국사(國史)』를 편찬하였다고 이해한다(이기동, 1994). 근래에 6부체제가 해체되고 국왕 중심의 집권체제가 운영되던 시점에서 왕실의 존엄을 강조하고 왕권에 대한 도전을 이념적으로 차단하려는 정치적 목적에서 『국사』를 편찬하였으며, 편찬과정에서 고구려와 백제에서 먼저 편찬된 사서들을 참고하였다고 주장한 견해가 제기되었다(姜鐘薰, 2011). 이 밖에 최근에 본서 신라본기 상고기(上古期) 기록의 기본원전은 『국사』였고, 초기 기록에 보이는 기년상의 오류는 모두 『국사』 찬자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전덕재, 2014; 2018, 26~38쪽). 한편 종래에 문사를 5세기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계층분화로 인하여 소국의 지배질서가 동요하던 때에 지방사회에서 신라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기반을 유지하려는 부류들로 규정한 다음, 이들은 이후 하위관등과 외위를 통해 새로운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 내로 조직화되었다고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었다(南希叔, 1991). 또한 이와 같은 견해를 수용하여 진흥왕대에 국사를 편찬하기 위하여 널리 모집한 문사에 지역공동체에서 정보 유통을 담당하였던 지방의 지식인들을 폭넓게 참여시켰다고 이해한 견해도 제기되었다(옥재원, 2015).〈참고문헌〉南希叔, 1991, 「新羅 法興王代 佛敎受容과 그 主導勢力」, 『韓國史論』 25,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이기동, 1994, 「고대의 역사인식」,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상』, 창작과 비평사姜鐘薰, 2002, 「新羅時代의 史書 편찬-진흥왕대의 「國史」편찬을 중심으로」, 『강좌 한국고대사 5』,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2011, 『삼국사기 사료비판론』, 여유당 재수록전덕재, 2014, 「 『三國史記』 新羅本紀 上古期 記錄의 元典과 改撰」, 『東洋學』 56옥재원, 2015, 「新羅의 國史수찬과 지방통치」, 『韓國史學史學報』 32전덕재, 2018, 『三國史記 본기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