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대 진흥왕(眞興王 AD 540~576) 10년 : 기원후 549년
▶ 양나라에서 부처의 사리를 보내다 : 549년 (음)
- 十年, 春, 梁遣使與入學僧覺德, 逸[정덕본과 을해목활자본에는 逸, 《삼국사절요》에는 送으로 되어 있다.]佛舍利. 王使百官, 奉迎興輪寺前路
- 10년(549) 봄에 양(梁)나라에서 사신과 입학승(入學僧) 각덕(覺德)[1]을 파견하여 부처의 사리(舍利)를 보냈다. 왕이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흥륜사 앞길[興輪寺前路][2]에서 받들어 맞이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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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각덕(覺德) : 신라에서 최초로 중국에 유학한 승려이다. 일찍이 불법(佛法)을 배우기 위해 남조의 양(梁)나라에 유학하였다가 진흥왕 10년(549) 봄에 양나라 사신과 함께 귀국하였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권2 각덕전(覺德傳)에서는 각덕이 총명하고 박식하였으며, 범인인지 성인인지 헤아릴 수가 없었고, 양나라에서 고명한 스승들을 두루 찾아 열심히 섬기면서 가르침을 받아, 덕행이 뛰어났고 인망(人望)이 높아졌다고 하였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귀국을 결심하였다고 기술하였다.
- 흥륜사 앞길[興輪寺前路] : 흥륜사 앞쪽에 개설된 도로를 말한다. 『삼국유사』 권제3 탑상제4 전후소장사리(前後所藏舍利)조에 “흥덕왕(興德王) 때인 태화(太和) 원년 정미(丁未; 827)에 〔당나라에〕 유학하였던 승려인 고구려[高麗] 승려 구덕(丘德)이 불경(佛經) 몇 상자를 가지고 왔으므로, 왕은 여러 사찰의 승려들과 함께 흥륜사의 앞길에서 〔그를〕 맞이하였다.”라고 전한다. 『삼국유사』 권제3 흥법제3 아도기라조에 금교(金橋)의 동쪽에 있는 천경림(天鏡林)이 전불시대(前佛時代) 7처가람의 하나였다고 전하고, 일연(一然)은 세주(細注)로서 천경림은 지금[고려]의 흥륜사라고 밝혔다. 종래에 일부 학자는 금교가 서천을 가로지르는 다리였다는 사실을 주목하여, 신라 당대에 금교를 건너 흥륜사의 앞길을 통해 월성의 정문인 북문(北門)에 도달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한 다음, 흥륜사 앞길은 바로 서천을 건너 월성의 정궁(正宮)으로 가는 진입로로서 기능하였다는 견해를 제기하였다(余昊奎). 또한 일부 학자는 흥륜사 앞길이 월성의 정문, 황룡사 남문 앞의 도로와 연결된다고 이해한 다음, 이것은 왕경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중심 축선상에 위치한 핵심 도로로서 기능하였다는 견해를 제기하기도 하였다(이현태). 한편 중고기까지는 흥륜사 앞길이 영묘사와 월성 서문(귀정문(歸正門))으로 이어졌다가, 중대에 들어와 월성 북문으로 이어졌을 것이라고 이해한 견해도 있다(이근직).〈참고문헌〉余昊奎, 2002, 「新羅 都城의 空間構成과 王京制의 성립과정」, 『서울학연구』 18이근직, 2006, 「신라 왕경의 성립과 전개」, 『건축역사연구』 15-4이현태, 2010, 「신라 중고기 里坊制의 수용과 왕경의 中心軸線」, 『선사와 고대』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