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대 진흥왕(眞興王 AD 540~576) 11년 : 기원후 550년
▶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다 : 550년 01월(음)
- 十一年, 春正月, 百濟拔高句麗道薩城.
- 11년(550) 봄 정월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1]을 쳐서 빼앗았다.[2]
▶ 이사부가 도살성과 금현성을 빼앗다 : 550년 03월(음)
- 三月, 高句麗陷百濟金峴城. 王乘兩國兵疲, 命伊湌異斯夫出兵撃之, 取二城增築, 留甲士一千戍之.
- 〔11년(550)〕 3월에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3]을 함락시켰다.[4] 왕은 두 나라의 군사가 피로한 틈을 타서 이찬(伊飡)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쳐서 두 성을 빼앗아 증축(增築)하고, 군사 1,000명을 머물면서 지키게 하였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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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도살성(道薩城) : 본서 권제35 잡지제4 지리2 한주 흑양군조에 “도서현(都西縣)은 본래 도서현(道西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도안현(道安縣)이다.”라고 전하는데, 이에 근거하여 도살성을 현재 충북 증평군 도안면에 해당하는 도서현으로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閔德植; 양기석 등, 34쪽). 이밖에 천안의 옛 지명인 도솔(兜率)과 ‘도살(道薩)’의 음이 비슷한 것에 착안하여 도살성을 천안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李丙燾, 57쪽) 또는 천안 목천토성으로 비정하는 견해(成周鐸, 1990; 2004, 139쪽)도 제기되었다. 『속일본기(續日本紀)』에서 설총(薛聰)의 아들을 살중업(薩仲業)이라고 표기하였는데, 신라에서 ‘살(薩)’과 ‘설(薛)’이 서로 통용되었음을 알려준다. 본서 권제36 잡지제5 지리5 웅주조에서 서림군(西林郡)이 본래 백제 설림군(舌林郡)이었다고 전하는 것에서 경덕왕 때에 ‘설(舌)’을 ‘서(西)’로 고쳐 개칭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한편 오늘날 강원도 강릉시에 해당하는 하슬라(何瑟羅)를 하서량(河西良) 또는 하서(河西)라고 표기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사례들을 참고하건대, 도살성(道薩城)을 ‘도설성(道薛城)’ 또는 ‘도서성(道西城)’이라고 표기할 수도 있고, 따라서 도살성을 증평군 도안면으로 비정하는 견해는 나름 타당성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현재 도살성을 구체적으로 증평군 도안면의 추성산성(이성산성)과 진천군 초평면 영구리의 두타산성 일대로 보는 견해(민덕식), 증평면 이성산성으로 보는 견해(양기석 등, 34쪽)로 나뉘고 있다.〈참고문헌〉李丙燾, 1977, 『國譯 三國史記』, 乙酉文化社閔德植, 1983, 「高句麗의 道西縣城考」, 『史學硏究』 36成周鐸, 1990, 「百濟 末期 國境線에 대한 考察」, 『百濟硏究』 21양기석 등, 2001 『新羅西原小京硏究』, 서경成周鐸, 2004, 『百濟城址硏究-續編-』, 서경
-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 본서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6년(550) 정월조에 동일한 내용이 보인다. 한편 본서 권제26 백제본기제4 성왕 28년(550) 정월조에는 “왕이 장군 달기(達己)를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도살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라고 전하여 약간 차이가 있다.
- 금현성(金峴城) : 현재 금현성(金峴城)을 신라의 웅주(熊州) 대록군(大麓郡)의 영현(領縣)으로서 금지현(金池縣)이라고도 전하는 구지현(仇知縣)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구지현은 현재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에 해당한다(양기석 등, 34쪽; 김영관; 여호규; 張彰恩). 백제 구지지산현(仇知只山縣)을 경덕왕대에 금구현(金溝縣)으로 개명한 사실을 통해 ‘구지(仇知)’를 ‘금(金)’과 치환이 가능한 글자임을 알 수 있는데, 이에 따른다면 구지현(仇知縣)과 금현성(金峴城)이 서로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이 밖에 금현성을 충북 진천군 진천읍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閔德植).〈참고문헌〉閔德植, 1983, 「高句麗의 道西縣城考」, 『史學硏究』 36양기석 등, 2001 『新羅西原小京硏究』, 서경김영관, 2008, 「古代 淸州地域의 歷史的 動向」, 『白山學報』 82여호규, 2013, 「5세기 후반~6세기 중엽 高句麗와 百濟의 국경 변천」, 『백제문화』 48張彰恩, 2016, 「나·제동맹기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 변천」, 『韓國學論叢』 45
- 고구려가 … 함락시켰다 : 본서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6년(550) 3월조에도 동일한 내용이 보인다. 한편 본서 권제26 백제본기제4 성왕 28년(550) 3월조에는 “고구려 군사가 금현성(金峴城)을 포위하였다.”라고 전한다.
- 왕은 두 나라의 군사가 … 지키게 하였다 : 본서 권제44 열전제4 이사부조에는 “왕이 두 나라 군사가 피로하고 지친 틈을 타서 이사부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공격하도록 하여 두 성을 취해 증축하고 갑사(甲士)를 머물게 하여 지켰다. 이때 고구려에서 군사를 내어 금현성을 공격하였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니, 이사부가 추격하여 크게 이겼다.”라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