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대 진흥왕(眞興王 AD 540~576) 12년 : 기원후 551년
▶ 연호를 개국으로 바꾸다 : 551년 01월(음)
- 十二年, 春正月, 改元開國.
- 12년(551) 봄 정월에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꾸었다.[1]
▶ 하림궁에서 우륵 등에게 가야금을 연주하게 하다 : 551년 03월(음)
- 三月, 王巡守次娘城, 聞千[정덕본에는 千, 을해목활자본에는 于, 《삼국사절요》·주자본에는 于로 되어 있다.]勒及其弟子尼文知音樂, 特喚之. 王駐河臨宮, 令奏其樂, 二人各製新歌奏之. 先是, 加耶國嘉悉王製十二弦琴, 以象十二月之律. 乃命于勒製其曲, 及其國亂, 操樂器投我. 其樂名加耶琴.
- 〔12년(551)〕 3월에 왕이 순행하다가 낭성(娘城)[2]에 이르러 우륵(于勒)[3]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4]이 음악에 정통하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그들을 불렀다. 왕이 하림궁(河臨宮)[5]에 머무르며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는데, 두 사람이 각각 새로운 노래를 지어 연주하였다. 이보다 앞서 가야국(加耶國)[6] 가실왕(嘉悉王)[7]이 12줄 현금[十二弦琴]을 만들었는데, 열두 달의 음률을 본 뜬 것이다.[8] 이에 우륵에 명하여 곡을 만들도록 하였는데,[9] 그 나라가 어지러워짐에 따라[10] 악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의탁하였다. 그 악기의 이름은 가야금(加耶琴)[11]이다.
▶ 고구려를 침공하여 10군을 빼앗다 : 551년 (음)
- 王命居柒夫等侵高句麗, 乘勝取十郡.
- 〔12년(551)〕 왕이 거칠부(居柒夫)[12]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는데,[13] 승리한 기세를 타서 10군(郡)[14]을 빼앗았다.[15]
=-=-=-=-=-=-=
[각주]
-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꾸었다 : 개국(開國)은 ‘나라를 열다’는 뜻인데, 연호를 개국으로 바꾼 것을 통해 진흥왕이 다시 나라를 열었다고 천명할 정도로 무엇인가 정국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꾀하였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종래에 진흥왕이 7세에 즉위하였다고 이해한 다음, 18세인 진흥왕 12년(551) 정월에 지소태후(只召太后)의 섭정으로부터 벗어나 친정(親政)을 하면서 연호를 개국으로 바꾸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李丙燾, 669쪽). 반면에 진흥왕이 15세에 즉위하였다고 이해한 경우는 진흥왕 6년(545)에 편찬한 『국사』를 왕통의 정통성을 천명하고 유교 정치이념에 입각하여 왕자(王者)의 존엄을 과시하는 성격의 사서로 규정한 다음, 15세에 즉위한 진흥왕이 친정체제로 들어갔음을 기념하는 의미를 지녔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李晶淑, 1994; 2012, 33쪽). 한편 진흥왕이 15세에 즉위하였다고 이해한 전제 아래, 친정체제를 한층 더 강화하고 정국운영을 주도하면서 대외팽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의도에서 연호를 개국으로 바꾸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전덕재).〈참고문헌〉李丙燾, 1976, 「眞興大王의 偉業」,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李晶淑, 1994, 「眞興王의 卽位에 대한 몇 가지 문제」, 『釜山女大史學』 12; 2012, 『신라 중고기 정치사회 연구』, 혜안전덕재, 2014, 「異斯夫의 家系와 政治的 位相」, 『史學硏究』 115
- 낭성(娘城) : 종래에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5 충청도 청주목조에서 청주(淸州)를 낭성(娘城)으로도 별칭한다고 전하는 사실을 주목하여, 낭성을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으로 비정하였다(정구복 외, 114쪽). 한편 충주 탄금대(彈琴臺) 주변에서 확인된 다수의 우륵 관련 설화를 근거로 하여 낭성을 충주지역으로 비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梁起錫).〈참고문헌〉梁起錫, 2006, 「國原小京과 于勒」, 『忠北史學』 16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 우륵(于勒) : 대가야의 악사(樂師)로서 가야금(加耶琴)을 만든 가실왕(嘉實王)의 명령으로 가야금 12곡을 지었다. 우륵은 성열현(省熱縣) 사람이라고 전하는데, 본서 권제35 잡지제4 지리2 한주조에 나제군(奈堤郡)의 영현(領縣)인 청풍현(淸風縣)의 본래 이름인 사열이현(沙熱伊縣)이라고 전하는 사실을 성열현과 연결시켜 우륵이 충북 제천시 청풍면 출신이라고 보기도 하나, 청풍면이 대가야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수긍하기 어렵다. 현재 경남 의령군 부림면의 삼국시대의 이름인 신이현(辛尒縣)이 성열현과 음이 비슷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부림면 지역을 우륵의 출신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백승충; 백승옥; 김태식). 이 밖에 성열현의 위치를 고령 주변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주보돈).548년 또는 549년 무렵에 대가야가 어지러워지자, 우륵이 그의 제자 이문(尼文)과 함께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하였는데, 진흥왕은 그와 이문을 새로 개척한 국원(國原: 충북 충주)에 거주하게 하였다. 우륵은 그 후 진흥왕의 명으로 계고(階古) 등에 춤과 노래, 가야금을 가르쳤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제14 충청도 충주목 고적조에 충주 견문산(犬門山)의 창벽(蒼壁) 두절(斗絶)에서 우륵이 거문고를 탔다고 하여, 그곳을 탄금대(彈琴臺)라 이름하였다고 전한다. 탄금대 주변에 우륵 관련 설화와 지명이 다수 전해진다(양기석).〈참고문헌〉白承忠, 1992, 「于勒十二曲의 해석문제」, 『韓國古代史論叢 3』梁起錫, 2006, 「國原小京과 于勒」, 『忠北史學』 16주보돈, 2006,「于勒의 삶과 가야금」, 『악성 우륵의 생애와 대가야의 문화』, 고령군 대가야박물관·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白承玉, 2007, 「加耶 '縣'의 성격과 省熱縣의 위치: 于勒의 출신지에 대한 재검토」, 『韓國民族文化』 30김태식, 2009, 「우륵 출신지 성열현의 위치」, 『악사 우륵과 의령지역의 가야사』, 홍익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우륵문화발전연구회
- 이문(尼文) : 우륵(于勒)의 제자로서 이문(泥文)이라고도 한다. 스승 우륵과 함께 신라에 투항하자, 진흥왕이 그들을 국원(國原: 충북 충주)에 거주하게 하였다. 본서 권제32 잡지제1 악조에 이문이 오(烏), 서(鼠), 순(鶉) 등 가야금 세 곡을 지었다고 전한다.
- 하림궁(河臨宮) : 충북 충주 탄금대(彈琴臺) 근처에 위치한 별궁(別宮)으로 추정되나 구체적인 위치를 알 수 없다. 가야금의 두 가지 조율(調律) 가운데 하림조(河臨調)가 있는데, 이것은 진흥왕 12년(551)에 우륵(于勒)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 등이 하림궁에서 연주한 곡조(曲調)와 관련이 있다고 짐작된다.
- 가야국(加耶國) : 대체로 대가야(大加耶)로 이해하고 있다.
- 가실왕(嘉悉王) : 가야국의 왕으로서 가야금을 제작하고, ‘여러 나라의 방언(方言)이 각기 다르니, 음악이 어찌 한결같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 다음, 악사(樂師) 우륵(于勒)에게 가야금 12곡을 만들게 하였다. 이를 통해, 가실왕이 여러 가야 소국의 음악을 제일화(齊一化)하여 가야연맹체의 통합을 도모하려 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현재 가실왕을 479년에 남제(南齊)에 사신을 파견한 하지왕(荷知王)과 동일 인물로 보는 견해(田中俊明, 68쪽), 이뇌왕(異腦王)보다 앞서 재위한 대가야의 왕으로 보는 견해(白承忠), 가실왕과 이뇌왕을 동일 인물이라고 보는 견해(권주현), 이뇌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대가야의 왕으로 보는 견해(노중국) 등이 제기되어 있다.〈참고문헌〉田中俊明, 1992, 『大加耶連盟の興亡と任那―加耶琴だけが残った』, 吉川弘文館白承忠, 1995, 「加羅國과 于勒十二曲」, 『釜大史學』 19권주현, 2000, 「于勒을 통해 본 大加耶의 文化」, 『韓國古代史硏究』 19노중국, 2012, 「6세기 전반 대가야의 왕위 교체와 정책의 변화-이뇌왕에서 가실왕으로의 왕위교체-」, 『韓國古代史硏究』 66
- 열두 달의 음률을 본 뜬 것이다 : 본서 권제32 잡지제1 악조에서 가야금(加耶琴)은 중국 악부(樂部)의 쟁(箏)을 모방하여 만들었다고 전하고, 또한 여기에서 인용한 신라고기(新羅古記)에서는 가야국(加耶國) 가실왕(嘉悉王)이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만들었다고 하였다. 동양의 12음계는 1년 12달에 부는 바람에 비정한다. 즉 황종(黃鍾)은 11월(정북풍), 대려(大呂)는 12월(동북풍), 대족(大簇)은 1월(동북풍), 협종(夾鍾)은 2월(정동풍), 고세(姑洗)는 3월(동남풍), 중려(仲呂)는 4월(동남풍), 유빈(蕤賓)은 5월(정남풍), 임종(林鍾)은 6월(서남풍), 이칙(夷則)은 7월(서남풍), 남려(南呂)는 8월(정서풍), 무사(無射)는 9월(서북풍), 응종(應鍾)은 10월(서북풍)의 바람소리를 본떠서 만들었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122쪽).
- 이에 우륵에 명하여 곡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 본서 권제32 잡지제1 악조에서 우륵이 지은 12곡은 하가라도(下加羅都), 상가라도(上加羅都), 보기(寶伎), 달이(達已), 사물(思勿), 물혜(勿慧), 하기물(下奇物), 사자기(師子伎), 거열(居烈), 사팔혜(沙八兮), 이사(爾赦), 상기물(上奇物)이라고 하였다. 이 가운데 보기는 황금색이 칠해진 구슬을 가지고 재주를 부리는 교예, 사자기는 사자춤을 가리키며, 나머지는 모두 지명 이름이다. 하가라도는 경남 김해(금관가야), 상가라도는 경북 고령(대가야), 달이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전하는 상·하다리(上·下哆利)와 연결시켜 전남 여수시 및 여수시 돌산읍으로, 사물은 경남 사천시, 물혜는 전남 광양시, 하기물·상기물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상·하기문(上·下己汶)과 연결시켜 전북 남원과 임실·장수지역으로, 거열은 경남 거창, 사팔혜는 경남 합천군 초계면, 이사는 경남 의령군 부림면으로 이해하고 있다(金泰植, 1993, 292~294쪽; 2002, 207~213쪽). 한편 하가라도를 경남 합천군 쌍책면에 위치한 다라국(多羅國), 달이를 경남 하동, 물혜를 경북 군위로 보는 견해도 있다(白承忠). 이밖에 하가라도를 대가야를 상·하로 나눈 것 가운데 하나로 이해한 다음, 구체적으로 합천군 봉산면지역으로 비정한 견해(이형기, 140~144쪽), 달이를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옥전고분군 축조세력이 세운 탁국(㖨國)과 연결시켜 이해하는 견해(전덕재) 등도 제기되었다. 대체로 우륵이 대가야 중심 가야연맹 소속국의 고유한 토속적 음악을 정리하여 가야금의 곡으로 만들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참고문헌〉金泰植, 1993, 『加耶聯盟史』, 一潮閣白承忠, 1995, 「加羅國과 于勒十二曲」, 『釜大史學』 19김태식, 2002,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2권』, 푸른역사이형기, 2009, 『大加耶의 形成과 發展 硏究』, 경인문화사전덕재, 2020, 「대가야의 음악과 전승」, 『대가야의 악-가야금과 우륵 12곡-』, 고령군 대가야박물관·서울시 한성백제박물관·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 그 나라가 어지러워짐에 따라 : 본서 권제32 잡지제1 악조에서 인용한 신라고기(新羅古記)에서는 “후에 우륵은 그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이라고 생각하여[後于勒以其國將亂]”라고 기술하였다. 악조의 기록에 따르면, 우륵이 장차 가야국이 어지러워질 것을 우려하여 신라에 투항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친신라파였던 우륵이 대가야가 친백제정책을 추진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신라로 투항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이영호; 남재우; 유우창). 한편 가실왕(嘉悉王)과 마찬가지로 우륵은 내부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고 연맹체의 결속력을 강화하려고 하는 통합파의 입장이었는데, 가실왕에 이어 즉위한 도설지왕(道設智王)이 친백제정책을 추진하면서 지배세력 사이에 갈등이 격화되자, 우륵이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으로 판단하고 마침내 신라로 망명하였다고 이해한 견해도 있다(노중국).〈참고문헌〉이영호, 2006, 「于勒 12曲을 통해 본 大加耶의 政治體制」, 『악성 우륵의 생애와 대가야의 문화』, 고령군 대가야박물관·계명대 한국학연구원남재우, 2009, 「가야 말기 于勒의 신라 망명」, 『악사 우륵과 의령지역의 가야사』, 홍익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우륵문화발전연구회노중국, 2012, 「6세기 전반 대가야의 왕위교체와 정책의 변화-이뇌왕에서 가실왕으로의 왕위교체-」, 『韓國古代史硏究』 66유우창, 2018, 「6세기 우륵의 망명과정」, 『역사와 경계』 108
- 가야금(加耶琴) : 가야국 가실왕이 중국의 악기를 참조하여 만든 악기로서 ‘가야고’라고도 부른다. 가야금의 울림통은 오동나무이고 12개의 현은 명주실로 만든다. 현을 지탱하는 나무괘는 기러기발처럼 생겼다고 해서 안족(雁足)이라 부른다. 가야금은 맨 손가락으로 타는데, 왼손은 안족 뒤편 줄 위에 놓고 줄을 흔들고 누르며 오른손은 줄을 뜯거나 밀고 퉁겨서 소리 낸다. 우륵의 제자인 계고(階古)·법지(法知)·만덕(萬德) 등이 우륵 12곡을 축약하여 5곡으로 만들었고, 진흥왕은 가야금을 신라의 대악(大樂)으로 삼았다. 이후 가야금은 신라인들에게 널리 사랑을 받아 거문고, 비파와 함께 신라 3대 현악기로 자리 매김하였다. 일본 나라시[奈良市] 동대사(東大寺) 정창원(正倉院)에 현이 12줄이고 양이두(羊耳頭)인 신라금(新羅琴)이 전하는데, 현재 신라금은 가야금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지만(李惠求, 宋芳松, 83~84쪽; 金英云), 일부 학자는 신라 고유의 악기를 계승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김성혜).〈참고문헌〉李惠求, 1978, 「音樂 舞踊」, 『韓國史』 2, 國史編纂委員會宋芳松, 1984, 『韓國音樂通史』, 一潮閣金英云, 1984, 「伽倻琴의 淵源에 關한 試論」, 『한국음악연구』 13·14合, 한국국악학회김성혜, 2017, 「정창원 신라금이 가야금이 아닌 이유」, 『韓國古代史硏究』 88
- 거칠부(居柒夫) : 거칠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6년(545) 7월조 참조.
- 왕이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입하여 : 544년 12월 고구려 안원왕이 위독하였을 때, 중부인측(둘째부인: 추군(麤群))과 소부인측(셋째부인: 세군(細群))이 서로 자기의 아들을 왕으로 삼으려고 평양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여기서 중부인측이 승리하여, 그녀의 아들인 양원왕이 545년 1월에 안원왕의 뒤를 이어 8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551년에 신라로 망명한 법사 혜량이 ‘고구려는 정란(政亂)으로 언제 망할지 모른다’고 언급한 것에서 544년 이후에도 귀족들의 내분이 지속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397~401쪽).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내분을 틈 타 서로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한 것으로 이해된다.
- 10군(郡) : 본서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7년(551)조에는 신라가 공격해 와서 10성(城)을 빼앗아갔다고 전한다. 이때 백제는 한강 하류지역을, 신라는 한강 상류지역을 차지한 것으로 이해한다. 종래에 10군을 나토군(奈吐郡: 충북 제천시)·평원군(平原郡: 강원도 원주시)·근평군(斤平郡: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양구군(楊口郡: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모성군(母城郡: 강원도 김화군 금성면; 북한 강원도 김화군 김화읍)·객연군(客連郡: 강원도 회양군 회양면; 북한 강원도 회양군 회양읍)·우수주(牛首州: 강원도 춘천시)·생천군(狌川郡: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대양관군(大陽管郡: 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 북한 강원도 금강군 금강읍)·나생군(奈生郡: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등 우수주 관할의 군으로 비정한 견해가 있었다(이인철, 1997; 2003, 108쪽; 張彰恩).한편 본서 권제45 열전제5 온달조에 온달이 “신라가 한강 이북의 땅을 군현으로 빼앗았다. … 떠날 때 맹세하기를,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이서(以西)의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전하고, 또한 본서 권제44 열전제4 거칠부조에 551년에 신라가 죽령(竹嶺) 바깥, 고현(高峴) 이내의 10군을 차지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9 흠명천황(欽明天皇) 13년조에 “이 해에 백제가 한성(漢城)과 평양(平壤)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의 우두방(牛頭方)이다.”라고 전한다(여기서 우두방은 강원도 춘천시로 비정된다). 두 기록을 참조하건대, 신라가 551년에 자치한 10군에는 계립령과 죽령 이서지역의 충북지방과 강원도 춘천시를 비롯한 영서지역이 망라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종래에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여, 10군을 우두군(牛頭郡)·근평군·양구군·성천군·평원군·나토군·잉근내군(仍斤內郡: 충북 괴산군 괴산읍)·술천군(述川郡: 경기도 여주시 흥천면)·금물내군(今勿內郡: 충북 진천군 진천읍)·개차산군(皆次山郡: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으로 비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전덕재).〈참고문헌〉이인철, 1997, 「신라의 한강유역진출과정에 대한 고찰」, 『鄕土서울』 57이인철, 2003 『신라 정치경제사 연구』, 일지사전덕재, 2009,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지배방식」, 『鄕土서울』 73張彰恩, 2011, 「6세기 중반 한강 유역 쟁탈전과 管山城 戰鬪」, 『震檀學報』 111
- 왕이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 10군(郡)을 빼앗았다 : 본 기록은 본서 권제44 열전제4 거칠부조에 전하는 기록을 축약하여 정리한 것으로 이해된다(李康來, 2006, 「 『삼국사기』 열전의 자료계통」, 『韓國古代史硏究』 46; 2007, 『三國史記 形成論』, 신서원, 273~2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