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대 진흥왕(眞興王 AD 540~576) 35년 : 기원후 574년
▶ 황룡사의 장륙상을 주조하다 : 574년 03월(음)
- 三十五年, 春三月, 鑄成皇龍寺丈六像, 銅重三萬五千七斤, 鍍金重一萬一百九十八分.
- 35년(574) 봄 3월에 황룡사(皇龍寺)[1] 장륙상(丈六像)[2]을 주조하여 완성하였는데, 구리의 무게가 35,007근(斤)[3]이고, 도금한 금의 무게가 10,198푼(分)[4]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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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황룡사(皇龍寺) : 황룡사에 대한 설명은 『삼국사기』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14년(553) 2월조 참조.
- 장륙상(丈六像) : 높이가 1장(丈) 6자[尺]되는 불상이라는 뜻으로, 부처의 키가 주척(周尺)으로 1장 6자였던 데서 비롯되었다. 장륙상(장륙존상)은 황룡사9층목탑,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와 함께 신라 3보(三寶)로 숭앙되었다.『삼국유사』 권제3 탑상제4 황룡사장륙조에 따르면, 인도[西天竺]의 아육왕(阿育王: 아소카왕)이 황철(黃鐵) 57,000근과 황금 30,000푼[分]을 모아 석가삼존상(釋迦三尊像)을 주조하려다가 실패하자, 이것들과 부처상 1구, 보살상 2구를 함께 배에 실어 보냈는데, 신라 진흥왕이 울산 하곡현(河曲縣) 사포(絲浦)에 도착한 배에 실려 있는 부처와 보살상을 동축사(東竺寺)에 모시고, 대건(大建) 6년 갑오(甲午: 574) 3월에 황철과 황금을 가지고 황룡사 장륙존상을 주조하였다고 한다. 한편 이 기록에서 인용한 사중기(寺中記)에서는 장륙존상을 계사(癸巳: 573) 10월 17일에 주조하였다고 하였다. 장륙존상은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골군이 황룡사를 불태웠을 때에 소실되었다. 인도의 전설적인 신불군주(信佛君主)인 아육왕이 보낸 금철(金鐵)로 남염부제(南閻浮提)의 십육대국(十六大國), 오백중국(五百中國), 십천소국(十千小國), 팔만취락(八萬聚落) 모두가 장육상을 주성(鑄成)하는데 실패하였음에 반해, 신라의 진흥왕만이 그것을 만들었다는 내용의 설화를 통해 신라가 인도와 같은 불국토(佛國土)였고, 신라왕과 아소카왕의 인연이 깊었음을 강조하려고 의도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설화에 전하는 바와 같이 장육불상을 ‘독력(獨力)’으로 조성할 수 없기 때문에 진흥왕은 아소카왕의 파트너이자, 후계자로서 인식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인도 불교계에서 아소카왕이 전륜성왕이 될 것이라는 부처의 예언을 선양하였듯이, 6세기 신라에서도 장육상의 설화를 통해 진흥왕이 바로 전륜성왕이자, 신왕인 아소카왕의 정신을 계승하여 그의 뜻을 완수한 위대한 성왕임을 드러내고자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판카즈 모한, 2004, 「6세기 신라에서의 왕권과 불교 간의 관계」, 『불교학연구』 9).
- 근(斤) : 통일신라 1근의 중량은 약 200g이었다고 한다(이종봉, 2001, 『韓國中世度量衡制硏究』, 혜안, 195~200쪽). 통일 이전의 경우도 비슷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 푼[分] : 푼은 여러 단위로 사용되는데, 척도(尺度)의 단위로서 1자[尺]의 100분의 1, 중량의 단위로서 1량(兩)의 100분의 1, 각도의 단위로서 1도의 60분의 1, 시간의 단위로서 1시간의 60분의 1, 지적(地積)의 단위로서 1무(畝)의 10분의 1, 화폐의 단위로서 1문(文)의 10분의 1이다. 여기서는 중량의 단위로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