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대 진흥왕(眞興王 AD 540~576) 33년 : 기원후 572년
▶ 연호를 홍제로 바꾸다 : 572년 01월(음)
- 三[정덕본에는 二, 을해목활자본에는 三으로 되어 있다. 《삼국사절요》·주자본에는 三으로 되어 있다.]十三年, 春正月, 改元鴻濟.
- 33년(572) 봄 정월에 연호를 홍제(鴻濟)[1]로 바꾸었다.[2]
▶ 왕태자 동륜이 죽다 : 572년 03월(음)
- 三月, 王太子銅輪卒.
- 〔33년(572)〕 3월에 왕태자(王太子) 동륜(銅輪)이 죽었다.[3]
▶ 북제에 사신을 보내다 : 572년 (음)
- 遣使北齊朝貢.
- 〔33년(572)〕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하였다.[4]
▶ 전사한 사졸을 위하여 팔관회를 개최하다 : 572년 10월20일(음)
- 冬十月二十日, 爲戰死士卒, 設八關筵會於外寺, 七日罷.
- 〔33년(572)〕 겨울 10월 20일에 전사(戰死)한 사졸(士卒)들을 위하여 〔서울〕 바깥의 사찰[外寺][5]에서 팔관연회(八觀筵會)[6]를 개최하여 7일 만에 마쳤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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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홍제(鴻濟) : 진흥왕이 31년(572) 정월에 사용한 연호이다. 홍제란 연호는 진평왕 6년(584) 2월에 건복(建福)으로 개원(改元)하기까지 사용되었다.
- 연호를 홍제(鴻濟)로 바꾸었다 : 종래에 홍제(鴻濟)가 “널리 구제한다.”라는 뜻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여, 진흥왕이 기존에 동맹관계를 맺었던 고구려와 사이가 벌어지자, 상당한 위기의식을 느껴 대외팽창보다는 기존의 영토를 확고하게 수호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정하고, 대신 연호를 홍제로 바꾸어 장기간의 전쟁으로 지친 백성들을 위로하는 데에 크게 관심을 기울였다는 견해를 제기하였다(전덕재). 한편 진흥왕이 한층 성숙한 전륜성왕(轉輪聖王)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연호를 태창에서 ‘널리 구제한다, 이룬다’는 뜻을 지닌 홍제로 연호를 바꾸었다고 이해한 견해도 제기되었다(최선자)〈참고문헌〉최선자, 2013, 「신라 황룡사의 창건과 진흥왕의 왕권 강화」, 『韓國古代史硏究』 72전덕재, 2014, 「異斯夫의 家系와 政治的 位相」, 『史學硏究』 115
- 왕태자(王太子) 동륜(銅輪)이 죽었다 :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지왕 즉위년(576)조에 “태자가 일찍 죽었으므로[太子早卒], 진지(眞智)가 왕위에 올랐다.”라고 전한다. 이를 통해 태자 동륜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음을 엿볼 수 있으나,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다.
-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하였다 : 『북제서(北齊書)』 권8 제기(帝紀)제8 후주(後主) 무평(武平) 3년(572)) 기록에 이 해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고 전하고, 『책부원귀(冊府元龜)』권969 외신부(外臣部) 조공(朝貢)제2 북제(北齊) 후주(後主) 무평 3년조에도 동일한 내용이 전한다.
- 〔서울〕 바깥의 사찰[外寺] : ‘외사(外寺)’라는 명칭에 주목한다면, 당시 왕경의 시가지 구역 바깥에 있던 사찰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진흥왕대만 하더라도 주로 왕경의 시가지 구역이나 그와 인접한 지역에 사찰을 조영했을 가능성을 시사해주는 자료로 주목되나, 이 기사 이외에 관련 기록을 더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창건 시기나 위치 등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한편 기존에 외사를 ‘황룡사의 외사’로 해석하여 현재 황룡사지 서쪽에 위치한 황룡사지 서편 사지로 추정한 견해도 있다(박방룡, 2013, 『신라도성』, 학연문화사, 376쪽).
- 팔관연회(八觀筵會) : 불교의 팔관재계(八關齋戒)와 고유신앙이 결합된 종교의식으로 팔관회(八關會)라고도 부른다. 팔관재계는 재가신도(在家信徒)가 하룻밤 하루낮 동안 받아 지키는 계율로, 8관(關)은 살생, 도둑질, 음행(淫行) 등 여덟 가지의 죄를 금한다는 뜻이고, 재(齋)는 오전 중에 한 끼만 먹고서 마음의 부정(不淨)을 맑게 하는 의식이다. 팔관회라는 용어는 인도의 팔계재(八戒齋)가 중국에 전해져서 팔관(八關)이라는 전통적인 액막이 관념에 근거하여 용어를 팔관재(八關齋)로 고쳐 사용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재액을 막기 위해서, 치병(治兵)·구명(救命)을 바라거나, 죽은 이가 욕계육천(欲界六天), 특히 그 중에서도 도솔천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위령제의 하나로 설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진흥왕대에 전몰장병을 위로하기 위하여 팔관회를 개최한 것은 바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안지원, 2005, 『고려의 국가 불교의례와 문화-연등·팔관회와 제석도량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출판부, 120~139쪽).
- 전사(戰死)한 사졸(士卒)들을 … 7일 만에 마쳤다 : 본서 권제44 열전제4 거칠부조에 진흥왕 12년(551)에 고구려에서 혜량법사(惠亮法師)가 망명해오자, 진흥왕은 그를 승통(僧統)으로 삼았는데, 이때에 비로소 백좌강회(百座講會)와 팔관(八關)의 법이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종래에 혜량이 처음으로 백고좌회(百高座會)를 주관하여 개최한 것은 황룡사가 준공된 진흥왕 27년(566)이었을 것으로 추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김복순). 이에 따른다면, 신라에서 처음으로 팔관회를 개최한 것도 이 무렵이라고 볼 수 있고, 따라서 진흥왕 33년(572) 10월 20일에 신라에서 처음으로 팔관회를 개최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진흥왕은 진흥왕 33년(572) 정월에 ‘널리 구제한다’는 뜻으로 풀이되는 홍제(鴻濟)로 연호를 바꾸었는데, 영토 확장 과정에서 고통을 당한 백성들을 위로하고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서 불법(佛法)의 힘으로 그들을 널리 구제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최선자). 진흥왕이 전쟁에서 죽은 사졸을 위하여 팔관회를 연 것도 역시 홍제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참고문헌〉김복순, 2010, 「신라의 백고좌법회」, 『新羅文化』 36최선자, 2013, 「신라 황룡사의 창건과 진흥왕의 왕권 강화」, 『韓國古代史硏究』 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