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4일 수요일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23대 법흥왕(法興王, AD 514~540) 27년 : 기원후 540년

23대 법흥왕(法興王, AD 514~540) 27: 기원후 540

 

법흥왕이 죽다 : 54007()

 

  • 二十七年, 秋七月, 王薨. 諡曰法興, 葬於哀公寺北峯.[정덕본에는 , 을해목활자본에는 으로 되어 있다.]
  • 27(540) 가을 7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법흥(法興)이라고 하고,[1] 애공사(哀公寺)[2] 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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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시호를 법흥(法興)이라고 하고 : 법흥왕 22(535)에 작성된 울주 천천리 각석 을묘명(蔚州 川前里 刻石 乙卯銘)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이라는 표현이 보이기 때문에 법흥을 시호라고 보기 어렵다. 신라인들은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고, 널리 유행시키는 데에 앞장섰기 때문에 법흥왕 당대에 불법을 일으킨 왕이란 뜻인 법흥대왕이라고 칭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2. 애공사(哀公寺) :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37(576) 8월조에 진흥왕이 사망하자, 애공사(哀公寺) 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고 전하고, 삼국유사권제1 왕력 제25 진지왕조에 왕의 무덤이 애공사 북쪽에 있으며, 같은 책의 권제1 기이제1 태종춘추공조에 태종무열왕이 59세에 사망하자, 애공사 동쪽에 장사지내고 비를 세웠다고 전한다. 조선 후기에 편찬한 동경잡기(東京雜記)2 고적조에는 애공사가 경주부(慶州府) 서쪽 10리에 있다.”라고 전하고 있다. 현재 보물 제67호로 지정된 경주시 효현동 삼층석탑이 있는 곳을 애공사 터라고 비정하고 있지만(韓國佛敎硏究院, 59~60; 진성규·이인철, 15~16),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대로 믿기 어렵다. 서악동고분군 가운데 4호분 남쪽 50m 지점에서 폐사지가 발견되었는데, 근래에 이곳을 애공사의 터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이근직, 231~239; 崔珉熙).
    〈참고문헌
    韓國佛敎硏究院, 1974, 新羅廢寺』Ⅰ, 一志社
    진성규·이인철, 2002, 신라의 불교사원, 백산자료원
    이근직, 2013, 신라왕릉연구, 학연문화사
    崔珉熙, 2017, 경주 서악동고분군에 대한 새로운 왕릉 명칭 비정, 新羅史學報40
  3. 애공사(哀公寺) 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 : 현재 경주시 효현동 산63번지 선도산 남산 중턱에 있는 고분을 사적 제176호 경주 법흥왕릉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이 고분의 봉토 높이는 3m 내외, 밑지름은 9.5m 내외이다. 그러나 사적 176호로 지정된 경주 법흥왕릉이 실제로 법흥왕의 무덤임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대체로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37(576) 8월조에 진흥왕을 애공사 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고 전하는 사실, 삼국유사권제1 왕력 제25 진지왕조에 진지왕의 무덤이 애공사 북쪽에 있다고 전하는 사실과 권제1 기이제1 태종춘추공조에 태종무열왕을 애공사 동쪽에 장사지냈다고 전하는 사실 등을 근거로 하여, 서악동고분군의 4개 고분 가운데 하나가 법흥왕릉이었다고 보고 있다(姜仁求, 1984; 2000, 425~426; 김용성; 이근직, 201~202).
    〈참고문헌
    姜仁求, 1984, 新羅王陵再檢討; 柳花溪羅陵眞贗說과 관련하여, 東方學志41; 2000, 古墳硏究, 학연문화사
    김용성, 2012, 경주 서악동 능원과 그 의의, 인류학·고고학 논총: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개설40주년 기념논총
    이근직, 2013, 신라왕릉연구, 학연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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