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대 법흥왕(法興王, AD 514~540) 11년 : 기원후 524년
▶ 남쪽 변방을 순행하다가 가야국의 왕을 만나다 : 524년 09월(음)
- 十一年, 秋九月, 王出巡南境拓地, 加耶國王來會.
- 11년(524) 가을 9월에 왕이 나아가 남쪽 변방의 새로 확장한 영토를 순행(巡幸)하였는데, 〔이때〕 가야국의 왕이 와서 만났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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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왕이 … 가야국의 왕이 와서 만났다 : 이때 법흥왕이 만난 가야국의 왕을 금관가야(남가라)왕으로 보는 견해와 대가야의 왕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먼저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7 계체천황(繼體天皇) 23년(529) 4월조에 신라의 이질부례지간기(伊叱夫禮智干岐: 이사부)가 ‘금관(金官: 경남 김해)·배벌(背伐)·안다(安多)·위타(委陀)’ 또는 ‘다다라(多多羅: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다대포)·수나라(須那羅: 경남 김해의 금관국)·화다(和多)·비지(費智)’ 등 4개 촌을 공략하여 차지하였다고 전하는데, 일찍이 이 기록의 기년을 524년으로 앞당겨서 이해한 다음, 신라 법흥왕이 이때에 차지한 지역에 순행하자, 금관가야왕이 찾아와서 항복의사를 밝힌 것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朱甫暾). 이 밖에 신라가 남가라(경남 김해시) 북부지역에 위치한 탁기탄(碌己呑)을 제거하기 위해 남부지역을 개척하였는데, 이때에 남가라(금관국)의 왕이 여기에 동조해 법흥왕을 와서 만났다는 견해(백승충), 신라가 낙동강 하류의 양산 물금방면을 새로 개척하고 법흥왕이 이곳에 순행하자, 이때 금관가야왕이 법흥왕을 만났을 것이라는 견해(이영식)도 제기되었다.반면에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7 계체천황(繼體天皇) 8년(514) 3월조에 반파(伴跛: 대가야)가 신라의 마차해(麻且亥)와 추봉(推封)을 빼앗고 촌읍(村邑)을 약탈하였다고 전하는데, 추봉을 경남 밀양으로 비정하고, 법흥왕이 법흥왕 11년(524)에 두 지역에 대한 경계, 특히 경남 창녕군 영산면으로 비정되는 탁기탄 주변의 경계를 대가야와 상호 확정해둘 필요가 있기 때문에 신라 법흥왕이 대가야의 왕과 만났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金泰植, 190~192쪽). 또 대가야가 514년에 빼앗은 마차해(창녕군 장마면 강리 및 유리 일대)와 추봉(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을 522년 3월 혼인동맹을 맺을 때에 신라에게 돌려주고, 이와 더불어 낙동강 서안의 일부 지역을 신라에 양보하였는데, 법흥왕이 524년에 이곳을 순행할 때에 대가야왕이 친선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법흥왕을 만났다는 견해(전덕재)도 제기되었다. 한편 신라가 새로 개척한 영토는 금관가야의 영역일 가능성이 높고, 신라의 남쪽 경역과 이해관계가 직접 얽혀있지 않은 대가야의 왕이 순행하던 법흥왕을 찾아와서 만났을 것이라는 견해(이문기)를 제기하기도 한다.〈참고문헌〉朱甫暾, 1982, 「加耶滅亡問題에 대한 一考察-新羅의 膨脹과 關聯하여-」, 『慶北史學』 4金泰植, 1993, 『加耶聯盟史』, 一潮閣이문기, 1995, 「대가야의 외교관계」, 『가야사연구-대가야의 정치와 문화-』, 경상북도白承忠, 1996 「加羅·新羅 '결혼동맹'의 결렬과 그 추이」, 『釜大史學』 20이영식, 2013, 「대가야와 신라, 혼인동맹의 전개와 성격」, 『역사와 세계』 44전덕재, 2018, 「가야지역을 둘러싼 신라와 백제의 대립」, 『신라와 백제, 소통과 갈등』, 충청남도역사문화원·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