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베루스 알렉산데르(Severus Alexander, 222~235)
- 로마 제국의 제24대 황제
- 재위 : 222년 3월 11일 ~ 235년 3월 18/19일
- 출생 : 207년 경
- 사망 : 235년 3월 19일
세베루스 알렉산데르(Marcus Aurelius Severus Alexander Augustus)는 세베루스 왕조 출신 마지막 황제이기도 하다. 222년에 암살당한 숙부 엘라가발루스를 이어 황제에 올랐으며, 그 자신도 암살을 당해 50년에 가까운 내전, 외국의 침입, 현재 논란되고 있는 화폐 경제 붕괴 등의 3세기의 위기가 일어났다.
[출생]
208년 오늘날의 레바논에 해당하는 시리아 속주 페니키아 아르카 카이사리아에서 태어났다. 출생 당시의 이름은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 알렉시아누스. 아버지는 이 지역 태생의 원로원 의원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마르키아누스, 어머니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처제로 황후 율리아 돔나의 여동생 율리아 마이사의 차녀 율리아 마마이아로 삼남매(혹은 4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다.
[218년]
서기 218년, 10살의 나이에 세베루스 왕조가 잠시 무너지면서 이 시기에 꽤 고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디오에 따르면, 이때 알렉산데르의 아버지, (이복)누나 부부가 엘라가발루스 옹립 움직임을 막기 위해 움직인 마크리누스 명령으로 살해됐다고 한다. 따라서 알렉산데르는 아버지를 여읜 이후, 제위에 오르기 전까지 외할머니와 함께 살던 어머니를 따라 로마 황궁에서 성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황제에 오르다]
오리엔트 지방의 소도시 알카 카이사리아 출생으로 222년 3월 13일에 엘라가발루스가 살해되면서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어린 황제는 차분했고 공부에 힘쓰고 부지런한 성격을 지닌 재목이었다. 그는 할머니 마이사, 어머니 마마이아에게 순종적이었고, 그들의 조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성실히 실천에 옮겼다. 따라서 그를 섭정하게 된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유명했던 법학자였던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와 파울루스를 근위대장에 앉혔고, 명목상 섭정 역할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16인의 원로원 위원회를 설치해 원로원과도 원활히 소통하여 문치를 펼쳤다.
[울피아누스 몰락]
223년 말 혹은 224년 초, 마이사와 마마이아의 친구이자 어린 황제의 고문이며 근위대장인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가 팔라티노 황궁 집무실 한복판에서 근위대 병사들 손에 살해됐다. 황제 면전에서 살해된 울피아누스는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마마이아의 적극적 후원을 받아왔고, 두 시리아 여인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와 울피아누스를 한몸처럼 다니게 할 정도로 그를 진심으로 신뢰했다. 따라서 근위대 병사들에게 현직 근위대장 중 1명이며, 알렉산데르 정부의 실권자 울피아누스가 대낮에 살해된 사건은 그 파장이 컸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와 두 섭정은 현직 근위대장을 암살한 병사들을 붙잡아 처형하지 못했다.
[율리아 마이사 사망하다]
224년경 여걸이던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가 사망한다. 마이사 사후, 그 실권은 유일한 아우구스타 직위를 갖게 된 어머니 율리아 아비타 마마이아의 몫이 됐다. 그런데 모후 율리아 마마이아는 그 능력이 율리아 돔나, 율리아 마이사보다 부족함에도, 본인의 능력을 과신했다. 그녀는 권력욕이 지나칠 정도로 강했고, 자신의 어머니, 이모와 달리 허세가 심했다. 더욱이 그녀는 아들 알렉산데르를 자신의 분신으로 여겨, 본인과 아들을 동일시하고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는 경향을 보였다.
[율리아 마마이아, 세이우스 살루스티아누스와 손을 잡다]
율리아 마마이아는 자신과 아들의 부족한 혈통적 권위를 위해, 야심 많은 로마 귀족 세이우스 살루스티아누스와 손을 잡고 이 사람의 딸 살루스티아 오르비아나와 알렉산데르를 225년 8월 결혼시킨다. 이때 마마이아와 알렉산데르는 자신들의 보호막이 될 세이우스 살루스티아누스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내리고 그를 황제의 장인이 아닌, 황족으로 만든다. 하지만 이 결정은 애당초 정략혼이면서도, 황제와 모후의 약점 보완 목적이 뚜렷해 갈등 이유가 됐다. 마마이아는 어머니 마이사 사후, 아우구스타라는 직위를 자신의 사유물로 생각했던 터라 이는 불행이 되고 만다.
율리아 마마이아는 생전의 율리아 마이사와는 달리 나서지 않을 때를 구분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자신에게 적정선에서 정치에 개입하도록 한 마이사가 죽자마자 아들 알렉산데르 위에 군림한 여제가 됐다. 이때 그녀는 아들에게서 이전까지 수많은 황후들이 누린 각종 명예를 넘어선 칭호들을 받아냈고, 결국 “전 인류의 어머니”라는 칭호까지 선사받았다.
[율리아 마마이아, 세이우스 살루스티아를 제거하다]
엘라가발루스를 없앨 때부터 근위대는 세베루스 가문에게 말 그대로 기회를 한번 주고 지켜보자는 입장이라서, 또 마마이아의 행동이 지나친 까닭에 세이우스 살루스티아누스를 보호해주기로 한다. 그런데 알렉산데르는 아내 오르비아나를 사랑하고 장인을 존경함에도 어머니에게 꼼짝 못하는 터라 이를 알고 있음에도 방치해버린다. 따라서 226년 8월 말, 율리아 마마이아는 뜬금없이 세이우스 살루스티아누스에게 "카이사르 직위를 이용해 변란을 일으키고 자신과 아들을 해하려고 한다"는 누명을 씌워 죽여버린다. 이에 대해 세이우스 살루스티아누스가 살기 위해 딸을 근위대 병영에 숨겨 꼬투리 잡혔다는 의견도 있는데, 이유가 어떻게 되었던 간에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는 율리아 마마이아였고 반역죄를 뒤집어 쓴 건 장인과 처가였다. 따라서 오르비아나는 227년 강제로 이혼당한 뒤, 아프리카 속주 중 동쪽 끝인 오늘날 리비아 북부 해안으로 추방된다.
[심상치 않은 근위대]
이 사건(세이우스 살루스티아누스 제거)은 율리아 마마이아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지만, 이는 그렇지 않아도 불만이 컸던 근위대 전체를 완전히 적으로 돌리고 만다. 애당초 근위대는 율리아 마이사 측의 요청으로 기회를 주며 지켜보는 위치였고, 223년 말(혹은 224년 초) 근위대장 울피아누스를 황궁에서 암살할 정도로 세베루스 가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더욱이 그들이 죽인 울피아누스는 마마이아의 친구이며 조력자였기에, 이는 세베루스 왕조와 근위대 간의 냉랭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페르시아 원정]
이런 상황 속에서 알렉산데르는 동방 문제로 ‘로마군 최고 사령관으로서의 황제’라는 부분에서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바로 파르티아를 누르고 새로운 동방의 적으로 급부상한 강력한 사산조 페르시아의 아르다시르 1세와 맞붙게 된 일이었다. 알렉산데르 입장에선 여기에서 성과를 낸다면 로마 황제로서 군사적인 재능을 인정받게 되는 이벤트였는데, 반대로 고전할 경우 또는 매끄럽지 못한 문제들에 터질 경우 큰 문제가 될 상황이었다. 사실 이는 로마 원수정 체제의 고질적 문제점이었고, 황제가 나름 정상적인 성장을 하면서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꾸준히 경력을 쌓았다면 상관이 없다. 그러나 알렉산데르가 전혀 그렇지가 않은데다 어머니의 치마폭에 휘둘려온 유약한 황제이다보니 시작부터 문제가 생겼다.
이에 5만 명 정도의 군사를 이끌고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으나 시리아 속주에서 군단병들의 파업에 부딪치고 페르시아와 일차전을 벌이나 막대한 피해만 입고 소득은 거의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원로원에는 승리로 보고한 뒤 철수해 234년 게르만족을 막기 위해 라인 전선으로 떠났다.
[마인츠 근처에서 살해당하다]
서방 전선은 카라칼라 시절, 카라칼라가 예방전쟁 차원에서 이 일대의 적들을 박살낸 덕분에 안정적이었다. 그런데 하필 이 무렵, 라인강 일대의 게르만 부족들이 여러 곳에서 동시에 라인강 국경을 돌파해 요새들을 파괴하고 이 일대의 로마 영내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다시 전쟁을 준비해야만 했다.
이 전투에서 교본대로 전술을 만들어 초기 승기를 잡은 알렉산데르는 로마군 내 장군들과 장교들의 반대에도 마마보이 황제라는 별명처럼 어머니 마마이아의 의견대로 게르만족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고 평화를 얻으려고 했던 것이다. 군사적 역량이나 경험이 없다시피한 알렉산데르 입장에선 시간벌기 요량으로 이런 제안을 했지만, 피를 흘려가면서 싸웠고 개전부터 승리를 거둔 군대 입장에서는 당연히 “황제가 무작정 싸울 생각도 안 하고, 이기고 있는데 어머니 말만 듣고 그 게르만족들에게 돈을 주면서 회유하려 든다”라고 반발했다. 게다가 이런 상황을 알고 있는 알렉산데르는 여기에서 결정적인 실책을 저지르고 만다. 바로 전투 중인 군단병들의 급료와 상여금, 군사지원비 등을 제한하는 조치들을 계획한 것이다.
결국 게르마니아 군단병들과 근위대는 반란을 일으켜 게르마니아 내 모군티아쿰(오늘날의 독일 마인츠) 병영에서 235년 3월 19일 자신들의 사령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이때 옹립된 막시미누스는 "나는 나약한 겁쟁이와 다르다"라고 선언하며, 병사들을 이끌고 황제 막사로 쳐들어갔다. 이후 그들은 자신들을 도운 기지 내 게르만족 출신 노예들의 신호에 맞춰, 황제 막사를 급습했다. 하여 고트족과의 전쟁 전략을 토의 중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비롯하여 그 자리에 있던 장군, 원로원 의원, 황제 자문위원들까지 모조리 살해됐다. 이때 그의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 역시 살해됐는데, 막시미누스와 그 병사들의 만행에 세베루스 왕조의 노예들은 어떻게든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저항하다 모두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알렉산데르가 게르만족과 평화 교섭을 진행하자 결국 이에 불만을 품은 근위대가 반란을 일으켰고 235년 3월 9일에 갈리아 지방의 마인츠 근처의 마을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해되었다. 이로써 5대에 걸친 세베루스 왕조가 붕괴되고 군인 황제 시대가 시작되면서 로마는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에 대한 평가]
알렉산데르가 완전히 복권되고, 병사들에게도 제대로 인정받게 된 것은 3년이 지난 238년부터였다. 왜냐하면 후임자인 막시미누스가 늘 그를 비난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막시미누스가 몰락하기 전까지 알렉산데르의 이름이나 세베루스 왕조에 대한 언급은 자제되었고, 그 이름은 비문에서 강제로 기록말살형 조치가 취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238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미움의 대상이 되고, 병사들 역시 서서히 그에게 등을 돌리면서 알렉산데르와 세베루스 왕조의 이름은 복권된다. 이때 병사들은 자발적으로 갈리아 지방에 알렉산데르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우고 그의 죽음을 후회했으며, 원로원 역시 238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몰락하자마자 원로원에서 신격화하여 공식적으로 복권시켰다. 따라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다시금 로마인들에게 민중과 원로원 모두의 사랑을 받았던 마지막 문민황제로 칭송받았다.
세베루스 왕조의 네 황제 중 그는 창건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이후 최고의 현군이라고 불릴 만큼, 일반 병사를 제외한 대다수의 로마인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이는 그 비교 대상이 종교적 광기에 휩싸인 미치광이로 당대에 공인된 엘라가발루스였던 까닭에 온건하고 정상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던 알렉산데르 대한 평가는 등장 당시부터 나쁠 수가 없었던 시대적 배경도 있을 것이다. 허나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당대, 후대 로마인이나 중세 이후 유럽인들에게 ‘로마 최후의 명군’, ‘관용과 언행일치가 몸에 배인 황제’ 등으로 찬사받은 것은 그가 오늘날 기준으로도 매우 존경받을 만큼 그 인격이 휼륭했던 것이 컸다.
하지만 재위 내내 스스로를 “전 인류의 어머니”가 되어 여제가 된 어머니에게 휘둘렸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이래로 군대의 힘이 강해졌음에도 군인들을 잘 통제하지 못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헤로디아누스는 뛰어난 내치와 잘 통제하지 못한 군무 능력이 결합된 그를 일종의 이중적 시각을 가진 군주로 묘사했고, 전해지는 당대의 사료들 역시 휼륭한 황제 임에도 지나치게 어머니에게 눌려 지낸 나약한 인물로 그를 표현하고 있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입장에서 다행이라면, 군에 의해 옹립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자체가 황제로서는 생각보다 별거 없는 인물이었음이 드러난데다 그가 죽고도 거의 100년 뒤에야 시대가 원한 스타일의 황제가 등장했던 점이다. 따라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사후 3년도 안 된 시점에 당대 로마인들에게 황제로서 완전히 복권됐고, 그가 피살된 지 1년도 안 되어 그를 살해한 병사들마저도 그가 가진 인격적 대단함을 그리워 했다. 이런 이유로 원로원은 그를 신격화시켰고, 로마군과 정부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까지 건립했다. 아예 황제였다는 것 자체를 부정당하고 일종의 참칭자로 단죄받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나, 이후 등장하는 여러 군인황제들에 비하면 알렉산데르는 당대 로마인들과 후대 로마인 모두에게 존경받는 황제였던 것이다.
[가족관계]
- 부친 :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마르키아누스
- 모친 : 율리아 아비타 맘마이아
- 배우자 : 살루스티아 오르비아나, 술피키아 멤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