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0일 일요일

[로마 제국] 제25대 황제 : 막시미누스 트라쿠스(Maximinus Tracus, 235~238)

막시미누스 트라쿠스(Maximinus Tracus, 235~238)


  • 로마 제국의 제25대 황제
  • 재위 : 235320~ 2385월초
  • 출생 : 173년 경
  • 사망 : 2385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미누스 트락스(라틴어 : Gaius Iulius Verus Maximinus Thrax)는 트라키아의 농민 출신으로 라인 지방에 출정하여 공을 세웠으며,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암살되자 부하들의 지지로 마인츠에서 최초의 군인 황제로 추대되었다.

 

도나우 강과 라인 강 유역의 여러 부족을 정벌하였으나 원로원을 무시 내지는 외면하는 정책을 진행하다가 폐위 선언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이탈리아로 진군하다가 자식들과 함께 부하들에게 피살되었다.

 

[트라키아 출신]

 

야망있는 또래 속주민들이 그렇듯이 출세를 위해, 또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출신보다는 능력이 중시되는 로마군에 보조병으로 입대했다. 그러니까 막시미누스는 태어났을 때부터 로마 시민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발칸 반도 출신의 속주민, 또는 어쩌면 그 당시 로마인들이 말하는 문명화된 야만족이었을지도 모른다. 트라키아 일대는 이 당시는 물론, 카라칼라의 안토니누스 칙령에 따라 시민권이 부여된 이후에도 변방이었고, 이중 막시미누스가 태어나고 자랐다는 동북쪽 일대는 같은 트라키아 속주 내에서도 주민들에게 반야만족 취급을 받던 동네였다.

 

낮은 신분으로 입신양명하기 위해 입대한 그는 비록 헬라어(그리스어)는 전혀 알지도 못하고 로마군의 공용어인 라틴어에조차도 지독하게 서툴렀지만, 젊은 시절부터 키가 8피트 6인치라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6]로 체격도 매우 좋고 힘도 좋고 털털하고 친근한 성격에 호쾌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그는 무려 말과 달리기 시합을 해서 이기고, 엄지손가락이 어찌나 굵은지 귀부인의 팔찌를 반지로 써도 될 정도였으며, 마차 한 대쯤은 가볍게 맨손으로 끌었고, 주먹으로 말의 턱을 때리면 말의 이빨이 우수수 털려나왔다고 한다. 과장이 많이 섞이긴 했지만 그야말로 엄청난 괴력과 강건한 신체를 지녔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트라키아 출신으로 양치기 노릇을 하다가 입대했다고 하는데 기운이 장사여서 당시 황제였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눈에 띄었다.

 

그 뒤로 전투력을 인정받아서 전방 군단에서 백인대장으로 굴렀지만 희대의 기행꾼 성도착자 황제 엘라가발루스에게 소환되어 네가 그렇게 힘이 좋다던데, 내 앞에서 여자 수십명하고 밤새도록 하렘플레이 해보겠는지?”라는 성희롱을 듣고는 그대로 군대를 그만두고 귀농해버렸다. 그러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에 다시 군에 복귀하여 최전방인 레누스(오늘날의 라인 강) 방어선의 신병교육대장으로 발령받았다.

 

[235] 황제로 선포되다

 

카라칼라, 엘레가발루스 재위기에 백인대장으로 있다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때는 라인 강 주둔 군단의 신병 훈련 책임자로서 대대장이 되었으며, 235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암살되자 라인 강 주둔 군단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다.

 

환갑이 넘은 나이의 대대장임에도 그 인기가 대단한 탓에,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가 돈으로 평화를 샀다는 소문이 퍼져 반란이 일어났을 때, 라인 강 방어선의 군단병들 입에서 차기 황제로 언급됐다. 이때 막시미누스를 적극 지지한 병사들은 게르마니아와 모군티아쿰을 군단기지로 삼고 있던 제22 데이오타리아나 군단[7]이었다고 하며, 그가 몸을 담고 있던 제4 이탈리카 군단 등 게르마니아 일대의 레누스 부대들과 동방에서 지원차 합세한 부대들까지 힘을 보탰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막시미누스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황제로 추대됐다. 이때 그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와 별로 인연이 없던 본국 이탈리아의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까지도 막시미누스를 지지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는 재위 기간 내내 도나우 강·라인 강 근처의 여러 게르만 부족들과 싸웠다. 이 지방에서 가도 건설 사업을 많이 벌여 이곳의 수많은 이정표에는 아직도 그의 이름이 남아 있다.

 

[238] 속주의 반란과 원로원에 의해 폐위되다

 

막시미누스는 업무 스타일 역시 과거의 페르티낙스처럼 자신의 성공을 자랑스러워 한 까닭에 본인의 결정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고집이 강하고 겸손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본인의 결정이라면 비판도 용납하지 않았을 정도로 꽉 막힌 면이 많았다. 이런 이유로 막시미누스는 제위에 오른 직후부터 무슨 일이든 휘하 병사들을 대하듯 처리했고, 정무 방면에서도 늘 강압적이고 직설적인 군대식으로 명령했다.

 

막시미누스의 태도는 여전히 원로원에게 적대적이었고, 약간의 비판이나 의문제기는 도전으로 인식돼 잔혹한 보복과 협박으로 이어졌다. 허니 원로원으로선 제 아무리 보살처럼 참아보려고 해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열등감과 권위주의]

 

더구나 더 큰 문제는 막시미누스가 자신의 미약한 출신과 조악한 언변에 대해 인지하고 큰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황제에 즉위하자마자 한 일이 공식기록에서 자기 부모의 이름을 지운 것이었다. 이에 대해 후기 로마 제국의 역사가 조나리스는 막시미누스 부모의 이름이 믹카, 아바바였다고 밝히고 있는데, 만일 이 이름이 맞다면 막시미누스가 이름을 듣는 순간 국경 밖 이민족스러운 부모의 이름을 수치스러워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최전방에서 야만족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본국과 후방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먼저 트락스의 군사행동은 실적에 비해 소모적이며 비용이 깨지니 텅 빈 국고를 세금을 올려 메꿀 수 밖에 없었던 탓에 원로원과 민중들의 세금부담은 날이 갈수록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재위 1년도 못 되어 그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연이어 벌어지게 된다. 막시미누스 황제가 게르마니아에서 부교를 놓고 군사작전을 벌일 때, 전직집정관 출신의 원로원 의원이자 장군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마그누스를 필두로 한 게르마니아 군대의 여러 장교들, 원로원 의원, 재무관 등이 라인강 북쪽 강변에서 군용 부교를 파괴하려고 음모를 꾸미거나(서기 235), 계속되는 소모전에 문제를 제기하며 항명하거나, 몇명의 원로원 의원들이 사람을 심어 암살을 시도했다가 발각되는 암살미수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이에 막시미누스는 로마법에서 정해진 사법절차를 모조리 무시하고, 그대로 가담자와 그들과 친분있는 자들을 모두 즉결처형했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막시미누스는 정당하게 항명을 한 장교들에게 까라는 대로 까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그들과 직속부하들까지 모조리 죽였다.

 

이렇게 3년이 흐르게 되니, 모든 로마인들은 독불장군 막시미누스를 진심으로 싫어하고 증오하게 됐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2381월 오늘날의 북아프리카 튀니지에 해당하는 아프리카 속주의 현지 농장주들이 높은 전시세금에 반발하여 트락스가 파견한 세리를 살해하고 관공서를 공격한 뒤, 아프리카 속주 총독인 79세의 고르디아누스 1세와 그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를 공동황제로 추대했다.

 

238년 제국의 세금 정책에 불만을 품은 아프리카 속주의 지주들이 반 막시미누스 봉기를 일으켜 세리를 죽이고 나이 많은 고르디아누스 1세를 황제로 선포하였고 곧 로마 원로원이 그를 폐위하고 공적(公敵)으로 선포하자 부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와 동북 이탈리아에 있는 아퀼레이아를 포위했다.

 

오랫동안 전투에서 잔뼈가 굵은 황제가 이끌고 있는 야만족과의 전투 경력이 풍부한 정예군을 휘하에 거느린데다 반역을 저지른 원로원을 토벌하러 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트락스는 꽤나 고전했다.

 

[살해되다]

 

그러나 도시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몇 달 동안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 사이, 불만을 품은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 두 공동 황제를 거쳐, 고르디아누스의 손자 고르디아누스 3세가 다음 후계자가 되었다.

 

어이없게 막시미누스라는 거대한 공적이 사라져버리자, 발비누스와 푸피에누스는 공동 통치로 정권을 유지해 나가긴 커녕 서로를 의심하고, 동료들인 원로원마저 두 황제파로 나뉘어 다투는 사이 고르디아누스 1세의 딸(고르디아누스 2세의 여동생) 안토니아 고르디아나와 공모한 병사들 손에 모두 살해되고 만다. 그리고 군인황제 시대에서 그나마 안정적이고 평화적으로 고르디아누스 3세가 뒤를 잇게 되었다. 허나 고르디아누스 3세는 애당초 티메시테우스, 필리푸스 아라부스 형제 등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속주 출신들이 내세운 꼭두각시였고, 소년 황제 역시 고대기록들과 달리 지극히 평범했고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와 너무 비슷했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 3세는 장인 티메시테우스 도움으로 몇 년간 잘 통치한 듯 하면서도, 그 내부는 언제라도 무너질 위기가 가득했고, 이런 우려대로 실권자 티메시테우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 중 급사하자 소년 황제는 모든 실권을 야심가였던 신임 근위대장 필리푸스 아라부스에게 넘겼다가 페르시아와의 전투 중 살해당한다.

 

[가족관계]

 

  • 배우자 : 카이킬리아 파울리나
  • 자녀 :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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