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디아누스 1세(Gordianus I, 238)
- 로마 제국의 제26대 황제
- 재위 : 238년 3월 22일 ~ 238년 4월 12일
고르디아누스 2세와 공동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와 경쟁 - 출생 : 159년 경
- 사망 : 238년 4월 12일
고르디아누스 1세(라틴어 : Gordianus I)는 스물 여섯 번째 공동 황제이다. 원로원 의원을 지내기도 했으며, 문학을 좋아하여 그리스 작가 필로스트라토스는 자신의 작품 〈소피스트들의 생애〉를 그에게 바치기도 했다.
공동황제는 아들이자 이름도 비슷한 고르디아누스 2세이며, 재위기간은 238년 3월 22일부터 4월 12일까지 불과 15일에 불과하다. 다만, 공동황제인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가 몇 시간 전 패사한 탓에 로마 제국의 77명 황제 중 가장 짧게 재위기간을 가진 황제 타이틀은 아들에게 내줬다. 보통 아들, 외손자 고르디아누스 3세와 함께 고르디아누스 왕조로 분류되기도 한다.
고르디아누스는 소아시아 태생의 그리스계로 수백년째 로마시민권을 세습한 로마인이었지만, 제국의 중심인 원로원 내에선 신참자였다. 하지만 그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처럼 말단병졸에서 승진해 대대장 신분으로 황제까지 오른 순수군인이 아닌, 소위 말하는 군단장급까지 군경력을 쌓고 의석을 제 힘으로 차지한 원로원 내 실력자였다. 또 이 사람은 온건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가졌는데 원래부터 문학적 기질을 타고난 교양인인데다 꼼수를 사용해 적을 만들거나, 자신이 쌓아올린 부를 과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르디아누스는 세베루스 가의 황제들과 원로원 동료들에게 평판이 상당히 좋았다.
[황제로 추대되다]
전형적인 로마 최상류층 출신은 아니지만 차근차근 경력을 쌓은 고르디아누스 1세는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암살되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막시미누스 트락스)가 황제였던 시절, 고령의 나이임에도 전직 집정관 신분으로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하는 아프리카 속주총독으로 파견되었다. 일반적으로 전직집정관 자격으로 파견되는 원로원 속주 성향상, 본인이 꿀보직 중 꿀보직인 아프리카 속주를 점찍어놓고 출마해 간 것으로 보이는데, 80이 다 된 나이에 평화로운 원로원 관할 속주총독에 아들과 같이 파견되었다는 것은 사실상 은퇴 직전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가 아프리카 프로콘술(속주 총독)로 일하던 238년초, 아프리카의 부유한 젊은 지주들은 막시미누스 트락스가 보낸 세리들을 죽이고 고르디아누스를 황제로 선포했다.
[막시미누스의 근위대장 비탈리우스를 암살하다]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는 원로원과 상의를 하는 와중에, 막시미누스의 프라이토리아 근위대장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비탈리아누스를 제거하기 위해 암살자까지 몰래 파견했다. 비탈리아누스 암살은 매우 비열하고 비양심적인 방법으로 진행됐다. 후일 원로원이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탄핵하면서, 처형 형태로 포장됐지만 고르디아누스는 비탈리아누스에게 교섭을 요청해 서신을 보낸 다음 그가 고르디아누스의 인장이 맞는지 확인하는 틈을 타서 준비된 단검으로 무참히 찔러 죽였다. 이를 담당한 이는 신체가 매우 강건하고 건장한 이로 고르디아누스 부자 휘하 재무관으로 신분을 위장한 암살범이었다고 한다.
비탈리아누스가 암살되자,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보낸 사람들과 고르디아누스 가문 사람들은 거리 곳곳을 돌아다니며 비탈리아누스가 야만족 황제에게 살해된 양 소문을 퍼뜨렸다. 이렇게 되니, 집정관들과 원로원, 로마시민들은 막시미누스가 또 잔혹한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해 겁에 질렀다. 이미 막시미누스 트락스의 무능함과 잔혹함, 독단적인 행동으로 여론은 황제를 갈아치워야 한다는 주장이 팽배한 터라 로마 시의 치안은 불안해졌다.
[로마의 혼란]
고르디아누스 부자 즉위 이후, 고르디아누스 가문 지지자들이 꾸린 자경단과 그 측근들의 사적 보복으로 수도 로마는 난장판이 됐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밑에서 근무한 관료, 세금징수원들은 고르디아누스 가문 지지자들에게 잡혀 살해되고 하수구, 테베레 강으로 던져졌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동상들은 보이는 족족 파괴됐고, 의문을 제기한 이들은 고발된 뒤 모조리 처벌받았다. 고르디아누스 지지자 중 일부는 떼를 지어 자신들에게 돈을 빌려준 채권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살해하고 행패를 부렸다. 그들은 원로원을 향해 돌을 던졌고 수도를 개판으로 만들었다. 이에 치안을 책임지게 된 도시 장관 사비누스는 치안 유지를 앞에서 진두지휘하다가 고르디아누스 지지자들이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순직했다. 따라서 이 사건에 대해 헤로디아누스는 이때 벌어진 고르디아누스 지지자들의 행동을 가리켜, 내전이 시작됐다고 평했다.
고르디아누스 부자를 지지해준 원로원은, 이들을 환영하며 황제로 승인할 뿐 마냥 지지하진 않았다. 원로원이란 집단은 공화정 이래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이 벌어지는 동네였고, 원로원을 주름잡고 있던 의원들 역시 각자의 가문, 출신지에 따라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 중이었다. 더욱이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판단과 달리, 원로원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지는 것을 우선시한 터라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부유하다고 한들 의원 전체가 이들을 온전히 지지해줄 일이 만무했다. 원로원 안에는 고르디아누스 부자보다 더 뛰어난 경력을 갖춘 이들이 즐비했고, 카펠리아누스와 친분이 있는 이들도 많이 있어 이들 부자의 서한이 낭독되었을 때 상황은 두 사람의 계산과 어긋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누미디아 총독 카펠리아누스]
누미디아 총독인 카펠리아누스는 포고문을 받은 직후 조용히 총독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고, 로마 속주 총독의 의무와 책임을 이유로 그동안 베르베르와의 전투를 통해 단련된 제3군단 병력을 이끌고 그대로 카르타고로 처들어간 뒤 즉시 이들 부자를 공격했다. 부임 이후 늘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고 규율을 엄히 한 야전사령관인데다 능력도 출중해 즉시 전투를 치룰 준비가 끝났다고 한다. 따라서 누미디아 주둔 제3군단은 그 즉시 바로 옆의 아프리카 속주로 진격했다.(카르타고 전투)
양측의 전투는 시작부터 누미디아 속주 측이 유리할 정도로 전력 차이가 많이 났는데, 상대 카펠리아누스와 제3군단이 처음부터 반란이라며 제대로 대응하니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누미디아 속주 병력을 이기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카펠리아누스의 심기를 제대로 건든 탓에 교섭조차 불가능해, 고르디아누스 2세는 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 내 지방 민병대 1천 명을 이끌고 전투를 벌이며, 최대한 시간을 벌고자 했다. 그렇지만 애당초 싸움이 제대로 될 수 없던 탓에 고르디아누스 2세는 교전 직후 그대로 전사했고, 시체는 찾을 수도 없게 됐다. 수비하던 민병대 역시 맞붙자마자 녹아내렸다는 표현에 걸맞게 그 자리에서 박살났다. 카르타고 시내는 병사들의 외침과 고르디아누스 부자를 지지한 농장주들이 죽임을 당하며 비명을 지르는 소리, 무고한 주민들이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리로 생지옥이 됐고, 여기저기에서는 불길이 일고 피냄새가 진동했다고 한다.
고르디아누스 1세는 자신의 침실에서 평온하게 승부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부하들에게 아들의 전사 소식을 전해들었는데, 그는 패배를 직감하고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이때 그는 절망에 사로 잡혀 매우 침울한 표정을 지은 뒤 차고 있던 허리띠로 목을 매 스스로 자결했다. 이는 황제 선포 후 한달도 안 된 3주 남짓이었다.
원로원도 이를 승인했지만 단 1달만에 아들이자 공동황제였던 고르디아누스 2세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살했다. 원로원은 사태 파악을 한 뒤에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를 공동황제로 선택한다. 이때 원로원은 독재자 막시미누스 타도를 결의했다.
[가족관계]
- 부친 : 알려지지 않음, 마이키우스 마룰루스 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로 추정
- 모친 : 알려지지 않음, 울피아 고르디아나 또는 셈프로니아 로마나로 추정
- 배우자 : 알려지지 않음, 파비아 오레스틸라로 추정
- 자녀 : 고르디아누스 2세, 안토니아 고르디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