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디아누스 1세(Gordianus II, 238)
- 로마 제국의 제26대 황제
- 재위 : 238년 3월 22일 ~ 238년 4월 12일
- 고르디아누스 2세와 공동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와 경쟁
- 출생 : 192년
- 사망 : 238년 4월 12일
고르디아누스 2세(192년 ~ 238년 4월 12일)는 로마 제국의 스물 여섯 번째 공동황제로 아버지 고르디아누스 1세와 함께 238년 3월에 황제에 올랐으나 재위 1달여 만에 누미디아 총독 카펠리아누스와 싸우다가 전사했고 뒤이어 고르디아누스 1세가 자살했다.
192년 로마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셈프로니아누스 로마누스 아프리카누스(Marcus Antonius Gordianus Sempronianus Romanus)로 아버지인 고르디아누스 1세와 똑같다.
고르디아누스 2세에게는 적어도 2명의 여자형제가 있었다. 이중 그의 누이동생 안토니아 고르디아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측근이자 히스파니아(오늘날의 스페인) 태생의 발부스를 시조로 하는 로마 명문 원로원 가문 출신의 원로원 의원과 결혼해서 고르디아누스 3세를 낳았다고 전해지는데, 그녀의 남편이자 고르디아누스 3세의 부친이 명문가 귀족인지 여부는 고르디아누스 가문의 가계처럼 확실하지 않으며 여러 증거상 정통성을 이유로 한 조작된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다.
[누미디아 총독 카펠리아누스와의 대결]
동시대 역사가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새 황제들의 편지와 원로원의 포고문이 제국 전역을 통해 발표될 당시, 바로 옆의 누미디아 외의 다른 지방 속주 총독들도 원로원의 조치를 이해하지 못해 어이없어 하거나 분노해 했다. 그래서 어떤 총독은 공문을 전달하려고 온 이를 붙잡아 고문을 하고, 그들을 반역죄로 죽였다고 한다.
누미디아 속주 총독 카펠리아누스는 세습 원로원 의원으로 전직 법무관 출신의 야전사령관이며 법률가였다. 그는 로마와 원로원 내 친구, 가족, 동료들에게 상황을 들어 알고 있었고, 원로원에서 자신에게 단순권고 차원에서 총독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청하자, 이러한 통고문을 즉각 거부했다. 애당초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황제 선언을 반역으로 본 사람인데다, 사적 원한도 깊고 성향 자체도 천상 군인이자 원칙주의자인 터라 이런 결정은 당연했다. 더욱이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황제 선포 후 벌인 행동이나, 이들의 명령으로 푸닉 지방에서 반기를 든 농장주들이 로마 재정공무원들을 죽이는 일까지 벌어져 카펠리아누스와 그 제장들은 통고문을 무시하기로 결정내린다.
당시 카펠리아누스는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속주 총독으로 부임한 고르디아누스 일가와 일을 협력하면서 이런 저런 이유로 오랫동안 앙심을 품을 정도로 감정이 대단히 좋지 않았다. 이 사람의 심기를 제대로 건든 일은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원로원에게 자신의 즉각 해임을 요청했다는 것이지만, 그보다 그를 더 화나게 한 일은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자신들의 대리인을 누미디아로 파견해, 일방적으로 총독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강요하고 협박하면서 자존심까지 건든 부분이었다.
그래서 카펠리아누스는 대부분의 총독들처럼 일단 기존 황제인 막시미누스 트락스에 대해 지지를 선언했으며, 고르디아누스 부자를 반역자로 여기고 즉시 이들 부자를 공격했다.
카펠리아누스가 북아프리카 일대의 유일한 정규군이라고 할 수 있는 제3군단을 이끌고 카르타고를 침공할 당시, 79세의 고르디아누스 1세는 카르타고 총독 관저에 머물고,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가 속주 내에 유일하게 주둔하고 있는 1개 군단를 이끌고 카펠리아누스 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방어선을 지키려고 했다. 이는 병력이 적고 카펠리아누스와 제3군단의 전투 경험과 실적을 생각해 짜낸 묘안이었는데,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카르타고 시내를 전장으로 삼아 벌인 카르타고 시가전은 시작부터 승부는 결정된 상태였다.
더 큰 불행은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모두 군사적 역량도 부족하고, 이 방면에서도 평균 이하였다는 건데 여기에서 고르디아누스 2세는 민병대와 정규군의 충돌을 감안하지 않고 장애물을 쌓은 다음 정면 충돌 방식으로 응전했다. 이렇게 되니, 악조건은 가중됐고 카르타고 시내는 생지옥으로 변하게 된다. 1천여명과 함께 카펠리아누스의 공격을 막던 46세의 고르디아누스 2세는 말을 타고 뛰어들어가는 무모한 방법을 사용하다가, 적진에 뛰어든 직후 전사했고 시체도 찾지 못하는 처지가 됐다. 그를 따라서 전면전을 펼친 고르디아누스 수비대 역시 녹아내렸다는 표현 그대로 박살이 나고, 이들을 지지한 농장주와 그 가족들, 무고한 카르타고 시민들은 반란 진압에 나선 제3군단의 공격에 살육된다. 따라서 시내 곳곳에서는 고르디아누스 지지자들인 농장주들이 비명을 지르고, 그 가족들이 끌려가면서 사정하는 곡소리가 시내를 울렸고, 시가지와 근교 농장들은 반란 진압 방식으로 살육과 방화를 자행하는 제3군단 손에 모조리 파괴된다.
이런 가운데, 고르디아누스 1세는 총독 관저 내 자신의 침실에서 여유롭게 소식을 기다렸다가, 아들의 전사 소식을 보고 받는다. 이때 고르디아누스 1세는 카펠리아누스 측과 교섭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울해했다. 그러다가 그는 방으로 들어간 뒤, 매고 있던 허리띠로 목을 매 스스로 죽었다. 이는 황제 선포 후 한달도 안 된 3주 남짓이었다.
사생활은 고고한 취미와 다르게, 매우 비밀스럽고 복잡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망 당시까지 미혼이었지만, 에드워드 기번의 기록처럼 22명의 공식 첩을 두고 있었고[3] 꽤나 비밀스러웠다. 따라서 그는 로마 상류층 중에서도 플레이보이 기질이 상당하고, 여자관계가 복잡했던 귀족이기도 했는데, 이런 탓에 기록되지 않은 사생아도 의외로 꽤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가족관계]
- 고르디아누스 1세(아버지)
- 안토니아 고르디아나(여동생) - 고르디아누스 3세(외조카, 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