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前漢) 고조(高祖, BC 206~195) 유방(劉邦)
- 출생 : 기원전 247년, 이름은 유방(劉邦), 유계(劉季)로도 불림
- 즉위 전 칭호 : 패공(沛公, 기원전 209년), 한왕(漢王, 기원전 206년)
- 즉위 : 기원전 206년
- 처 : 여후(呂后)
- 자녀 : 아들 8명, 딸 1명
- 사망 : 기원전 195년, 회남왕 토벌 중 화살에 맞아 사망
# 가난한 농민의 아들, 황제가 되다
유방(훗날 고조)은 중국 역사의 위대한 영웅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도적으로 변신했다가 중국의 황제가 되었고 400년간 중국을 통치한 한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중부 지방의 하급 경리(警吏)였던 유방은 진왕조에 반기를 들었고 수많은 추종자를 끌어모았다. 그는 뒤에 항우가 이끄는 주요 반란군과 힘을 합쳤지만 두 사람의 사이는 곧 틀어졌다. 유방은 항복한 진에 대해 약탈을 금지하고 황실 포로들의 목숨을 구해주는 등 온건한 태도를 보였지만 항우는 수도 센양을 파괴하고 진 황족을 모두 몰살했다.
# 항우와 유방의 대결, 갈등
그들의 갈등은 단순히 인성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신구 세력간의, 귀족과 농민간의, 과거 제후국들과 통일 제국간의 투쟁이었다. 제국이 멸망하면서 이전 봉건 제후국들의 야심과 경쟁심이 부활했고, 귀족 출신인 항우는 자신이 다스리던 초가 패권을 쥐고 이전 제후국들을 재건하기를 원했다.
# 천하 통일과 중앙집권 강화
기원전 206년에 한의 왕이 된 유방은 이러한 봉건주의로의 회귀에 반대하여 쓰촨에 있는 자신의 강력한 진지에서 중국 정복사업에 착수했다. 기원전 202년 무렵, 유방은 드디어 항우를 물리치고 한 왕조의 고조(高祖)로 즉위했다. 수도 장안은 전략적으로 과거 진의 수도였고 이제는 폐허가 된 센양 근처 웨이수이(渭水) 기슭에 위치했다.
고조의 첫 과업은 제국의 통일을 재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는 분열된 군과 제후국의 통치자들을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신의 형제나 아들로 대체함으로써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새롭게 강화했다(군국제).
# 국가 경제 재건을 위한 노력
5년 동안의 전쟁으로 기근이 만연하고 물가가 치솟았으며 국가 경제가 붕괴되었다. 제위에 오른 고조가 전용 마차를 끌 같은 색 말 네 필조차 구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국가 재정을 회복시키기 위해 고조는 엄격한 절약과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고 토목공사와 대외 원정을 자제하였다. 서북부에서 세력을 확장한 중국의 오랜 적인 흉노에 대해서는 그 지도자와 한의 공주를 결혼시키고 조공을 보냄으로써 화친을 맺었다. 가혹하기 그지없는 진의 형법은 개혁했으나 기본적인 진의 행정 체제는 계속 유지했다. 또한 투기와 부당 이득을 좇는 상인들에게는 세금을 무겁게 물렸으며, 비단옷을 입고 마차를 타고 관직에 오르는 것을 금지시켰다.
# 유교를 통한 통치
통치태도에 변화를 주었으며, 진의 법가는 한의 유가로 알려진 공자의 사상으로 서서히 대체되었다. 그것은 훌륭한 정부는 강제가 아니라 동의에 기초한다는 믿음, “천하를 말 위에서 얻을 수는 있지만 다스릴 수는 없다”는 말로 설명되는 믿음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 한고조 유방의 성공 원인
후대의 사가들은 고조가 천자의 지위에 오른 것을 ‘천명’(天命)의 사례로 인용했고, 그에게 학식 높은 선비가 갖춰야 할 모든 유교적 덕을 부여했다. 사실 고조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평생 사투리를 썼으며 거친 언행으로 귀족 출신 관료들을 아연케 했다. 그러나 고조는 대단히 총명하고 뛰어난 전략가이며 용감하고 관대한 군주였다. 그의 강점은 특히 사람을 판단하고 조언을 받아들이는 능력에 있었다. 본래 소박한 생활을 좋아하고 학자들을 비실용적인 이론가라고 불신한 것과는 달리, 고조는 유교의 주된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학자들을 대신으로 임명했으며 정교한 궁중 의례를 받아들였다. 궁중 의례는 청동기 시대의 위대한 주 왕조의 그것을 계승함으로써 한 왕조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주의 군주들은 처음으로 자신을 천자라 부르고 천명을 주장했으며, 따라서 그들의 초기 치세는 번영을 구가한 황금시대로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