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대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 AD 184~196) 2년 : 기원후 185년
▶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고 사면하다 : 185년 01월(음)
- 二年, 春正月, 親祀始祖廟, 大赦.
- 2년(185) 봄 정월에 왕이 직접 시조묘(始祖廟)[1]에 제사를 지내고 크게 사면하였다.
▶ 좌ㆍ우군주를 임명하고 조문국을 공격하다 : 185년 02월(음)
- 二月, 拜波珍湌仇道·一吉湌仇須兮爲左·右軍主, 伐召文國. 軍主之名, 始於此.
- 〔2년(185)〕 2월에 파진찬(波珍湌)[2] 구도(仇道)[3]와 일길찬(一吉湌)[4] 구수혜(仇須兮)[5]를 좌·우군주(軍主)[6]로 임명하여 조문국(召文國)[7]을 공격하였다. 군주(軍主)라는 이름이 이때부터 사용되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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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시조묘(始祖廟) : 신라에 있었던 사당으로, 국가 제사 중 하나인 시조에 대한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남해차차웅 3년(6) 정월조의 시조묘에 대한 주석 참조.
- 파진찬(波珍湌) : 신라 경위(京位) 17관등(官等) 중 제4등에 해당한다.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9년(32)조의 파진찬에 대한 주석 참조.
- 구도(仇道) : 아달라이사금대와 벌휴이사금대에 활동한 생몰년 미상의 인물로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의 부친이다. 본서 권2 신라본기2 아달라이사금 19년(172) 정월조의 구도에 대한 주석 참조.
- 일길찬(一吉湌) : 신라 경위(京位) 17관등(官等) 중 제7등에 해당한다.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9년(32)조의 일길찬에 대한 주석 참조.
- 구수혜(仇須兮) : 아달라이사금 19년(172) 1월에 구도와 함께 관등을 수여받았으며, 이때에 역시 구도와 함께 조문국(召文國)을 정벌하였다. 그 외의 행적을 알 수는 없다.
- 군주(軍主) : 신라 최고 지방행정단위인 주(州)의 장관직으로, 이름을 볼 때 원래는 군단의 최고지휘자 직위에서 유래했다고 추정된다. 즉 군사활동을 통해 확장한 지역의 행정 책임을 군 지휘관인 군주가 맡게 되면서, 지방장관직의 이름으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본서 권40 잡지9 직관하 외관조에 의하면 도독(군주)에 임명될 수 있는 관등은 급찬(級飡)에서 이찬(伊飡)까지지만, 신라본기 기사에서는 주로 사찬(沙飡)으로 임명된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 주에 1명 있는 지방관으로서는 있기 힘든 칭호인 ‘좌・·우군주’라 되어있는 점 등을 볼 때, 지방장관이라기보다 군단 지휘관의 성격이 강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후대의 군주 칭호를 소급하여 적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여기에서 좌군주에 임명된 구도(仇道)가 동왕 7년(190) 8월조에 정예 기병 500을 이끄는 군사활동을 하는데, 이를 근거로 좌·우군주가 6부병의 지휘권을 가진 관직으로 장군의 전신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李文基, 192쪽). 후대의 군주와 달리 유사시에만 군대를 통솔하는 중앙의 임시 관직으로 보는 것이다(申瀅植, 1975). 이와 달리 해당 기사에서 구도가 패전으로 좌천되고 설지(薛支)가 좌군주로 임명되었던 것을 볼 때, 전시와 평시 구분 없이 좌·우군주의 직위는 유지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최상기, 76~78쪽).〈참고문헌〉申瀅植, 1975, 「新羅軍主考」, 『白山學報』 19李文基, 1997, 『新羅兵制史硏究』, 一潮閣최상기, 2020, 「新羅 將軍制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조문국(召文國) : 소문국이라고도 하며, 현재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일대에 있었던 진한(辰韓)의 소국이다. 본서 지리지에 의하면 고려 시대 의성부(義城府)였던 문소군(聞韶郡)은 원래 조문국이었다고 한다. 이를 이어받아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서도 의성 지역이 원래 조문국이었다는 기술이 계속된다. 『대동지지(大東地志)』와 『읍지(邑誌)』에는 현재의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에서 남쪽으로 25리 떨어진 금성면 일대라고 밝혀 놓고 있어 조문국의 중심지를 알 수 있다.〈참고문헌〉박순교, 1994, 「召文國考」, 『芝邨金甲周敎授華甲紀念史學論叢』李炯佑, 2000, 『新羅初期 國家成長史 硏究』, 영남대학교출판부주보돈, 2010, 「문헌상으로 본 義城의 召文國과 그 向方」, 『한국 고대사 속의 召文國』, 경북 의성군·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조범환, 2011, 「召文國과 斯盧國과의 관계 변화과정과 그 영향」, 『조문국의 성쇠와 지배세력의 동향』, 경북 의성군·한국고대사탐구학회
- 군주(軍主)라는 이름이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 동일한 서술이 본서 권4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 6년(505) 2월조에도 나온다. 지방장관으로서의 군주는 지증왕 6년(505)에 이사부(異斯夫)가 임명된 실직군주(悉直軍主)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되며, 이 기사는 후대 군주의 기원적 성격을 보여주는 자료로 보이는데, 이를 유사시에만 군대를 통솔하는 임시적인 관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申瀅植, 1975, 「新羅軍主考」, 『白山學報』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