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대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AD 134~154) 15년 : 기원후 148년
▶ 박아도를 갈문왕에 봉하다 : 148년 (음)
- 十五年, 封朴阿道爲葛文王 新羅追封王皆稱葛文王, 其義未詳..
- 15년(148)에 박아도(朴阿道)[1]를 갈문왕(葛文王)[2]에 봉하였다. 신라에서는 추봉(追封)한 왕을 모두 갈문왕이라고 칭하였다. 그 의미는 잘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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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박아도(朴阿道) : 신라 초기에 활동한 인물로, 본서 권45 열전5 박제상전에 나오는 “시조 혁거세의 후손이고 파사이사금의 5세손이다. 할아버지는 아도(阿道) 갈문왕(葛文王)이고, 아버지는 파진찬(波珍湌) 물품(勿品)이다.”라는 기록을 통해, 눌지마립간 시기에 왜(倭)로 건너가 미사흔을 구출하고 순국한 박제상의 조부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일성이사금 시기에 박아도가 갈문왕으로 추봉된 것은 그가 일성이사금의 친부(親父)였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하는 견해도 있다. 즉 본서 일성이사금 즉위조에 일성이 유리이사금의 맏아들로 나오지만, 유리와 일성의 사망 연도가 각각 서기 57년과 154년으로 나오는 것을 보아 양자가 실제 부자 관계였을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하고, 오히려 일성이 갈문왕으로 추봉한 박아도가 그의 아버지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李基白, 1974, 「新羅時代의 葛文王」,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20쪽).
- 갈문왕(葛文王) : 신라 왕호의 일종으로, 어의(語義)는 미상. 본 기사에서는 협주를 통해 갈문왕을 생전이 아니라 ‘사망한 뒤 봉한[追封]’ 왕으로 설명하였다. 왕의 즉위 기사에 나오는 갈문왕들을 제외하고는, 본 기사에서 보이는 박아도가 갈문왕에 책봉된 최초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를 비롯하여 6세기에 만들어진 신라의 각종 비석이나 각석(刻石)에서는 갈문왕이 사후에 추봉된 것이 아니라 생전에 활동한 것으로 드러나, 본 기사에서 전하는 추봉왕과는 차이를 보인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는 ‘매금왕(寐錦王)’이라 칭해진 왕과는 구분되는 지위이지만, 동시에 왕에 버금가는 특수한 지위였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본 기사에서 추봉한 왕을 모두 갈문왕이라 했다고 한 것은 아마도 본서의 편자(編者)인 김부식(金富軾)의 견해로 보이는데, 이어 그 의미를 알 수 없다고 언급하고 있어 갈문왕의 유래나 성격에 대해 고려 중기에는 이미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던 것 같다.본서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갈문왕의 사례를 종합적으로 고찰한 연구가 일찍이 발표되었는데(李基白, 1972), 그에 따르면 갈문왕은 왕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세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는 왕비나 왕모의 아버지, 즉 왕의 장인이나 외할아버지이고, 둘째는 왕의 아버지지만 자신은 왕이 아니었던 인물이며, 마지막으로는 왕의 동생이다. 이 세 가지 유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 간 것으로 나타나는데, 대체로 박씨 왕실 시대에는 왕비의 아버지가, 석씨 왕실 시대에는 왕모의 아버지나 왕의 아버지가, 그리고 김씨가 왕위를 독점하게 된 이후부터는 왕의 동생이 주로 갈문왕이 되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왕비와 왕모의 부친이 갈문왕이 된 경우는 신라 국가 자체가 박, 석, 김 삼성 족단의 연합체로서의 성격을 지녀서 아직 왕권이 충분히 강하지 못했던 까닭에, 왕실과 혼인을 통해 유대를 강화한 유력 족단의 우두머리가 갈문왕으로서 함께 국정을 이끌어 가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그러나 내물~눌지를 거치면서 김씨 족단이 왕위를 독점하게 되고, 그와 더불어 기존의 삼성 족단 체제를 대신하여 6부 체제가 자리를 잡게 되자, 김씨 왕실의 특정 가계에서 갈문왕의 자리를 차지하는 관행이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와 「울진 봉평리 신라비」 등 6세기 초의 금석문을 보면, 국왕을 가리키는 ‘매금왕(寐錦王)’은 6부 중 ‘탁부(喙部)’ 소속으로 나오고 그의 아우인 갈문왕은 ‘사탁부(沙喙部)’ 소속으로 나오는데, 눌지왕의 아우 ‘복호(卜好)’의 손자인 ‘지도로(至都盧: 지증왕)’와 그의 아들 ‘사부지(徙夫智: 입종[立宗])’가 바로 ‘사탁부’ 출신의 갈문왕들이다. 그뿐 아니라 복호 역시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에 ‘파호(巴胡) 갈문왕’으로 표기되었으며, 본서 지증마립간 즉위조에는 복호의 아들이자 지증왕의 아버지인 습보(習寶)도 갈문왕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즉 눌지왕 대부터 갈문왕 자리는 복호-습보-지증-입종으로 이어지는 김씨 왕실의 특정 가계에서 세습해 갔음을 알 수 있다. 마립간 시기에 김씨 족단은 눌지계와 복호계가 각각 ‘탁부’의 매금왕과 ‘사탁부’의 ‘갈문왕’ 자리를 차지하고, 6부 체제를 자신들의 주도로 운영했던 것이다(윤진석, 2010).갈문왕은 중고기에 들어가 6부 체제가 사실상 해체되고 국왕을 중심으로 한 일원적인 지배체제가 구축되면서 정치적 위상이나 역할이 차츰 하락해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신 법흥왕 대에 신설된 상대등(上大等)이 귀족회의의 수장으로서 왕을 보좌하면서 국정을 이끌어간 것으로 파악된다(강종훈, 2016). 갈문왕은 왕에 버금가는 최고 지위의 소유자로는 인식되었지만 정치적 실권에서는 점차 멀어져 갔고, 그러한 추세는 중대 이후 유교적 왕자관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으면서 더욱 굳어졌던 듯하다. 통일신라 시기에 9세기 전반 희강왕의 장인이었던 충공(忠恭) 이외에는 갈문왕호를 지닌 인물이 사료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이러한 배경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한편 상고기의 갈문왕 중 왕비나 왕모의 아버지의 경우, 후대에 일괄적으로 추봉된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박수진, 2018).〈참고문헌〉李基白, 1972, 「新羅時代의 葛文王」, 『歷史學報』 58; 1974,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河廷龍, 1994, 「新羅上代 葛文王 硏究」, 『民族文化硏究』 27宣石悅, 2003, 「麻立干時期의 王權과 葛文王」, 『新羅文化』 22徐毅植, 2007, 「新羅 ‘上代’의 葛文王 冊封과 聖骨」, 『歷史敎育』 104윤진석, 2010, 「5∼6세기 신라 사탁부 갈문왕」, 『大丘史學』 100강종훈, 2016, 「회의체」, 『신라의 통치제도』(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08), 경상북도박수진, 2018, 「신라 갈문왕호의 성립배경에 관한 연구」, 『先史와 古代』 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