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대 지마이사금(祇摩尼師今, 112~134) 1년 : 기원후 112년
▶ 지마이사금이 즉위하다 : 112년 10월(음)
- 祇摩尼師今立 或云祗[정덕본에는 祗로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을해목활자본에는 祇로 되어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는 祇를 따랐다.]味.. 婆娑王嫡子, 母史省夫人. 妃金氏愛禮夫人, 葛文王摩帝之女也. 初婆娑王獵於楡湌之澤, 太子從焉. 獵後過韓歧部, 伊湌許婁饗之. 酒酣, 許婁之妻, 推門[정덕본·주자본·을해목활자본에는 推門으로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에는 以로 되어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는 자형과 문의(文意)를 보아 携를 따랐다.]少女子出舞. 摩帝伊湌之妻, 亦引出其女, 太子見而恱之. 許婁不恱, 王謂許婁曰, “此地名大庖, 公於此置盛饌羙醞, 以宴衎之, 冝位酒多, 在伊湌之上.” 以摩帝之女, 配太子焉. 酒多後云角干.
- 지마이사금(祇摩尼師今)[1]이 왕이 되었다. 혹은 지미(祗味)[2]라고도 한다. 파사왕(婆娑王)의 적자이며, 어머니는 사성(史省) 부인[3]이다. 왕비는 김(金)씨인 애례(愛禮) 부인[4]인데, 갈문왕(葛文王) 마제(摩帝)[5]의 딸이다. 처음 파사왕이 유찬(楡湌)의 못[6]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태자가 따라갔다. 사냥을 마친 후 한기부(韓歧部)[7]를 지나게 되었는데, 이찬(伊飡) 허루(許婁)[8]가 잔치를 베풀었다. 술이 어느 정도 돌자, 허루의 처가 어린 딸을 데리고 나와서 춤을 추었다. 마제 이찬의 처도 역시 그 딸을 이끌고 나오니, 태자가 보고서 기뻐하였다. 허루가 언짢아하니, 왕이 허루에게 말하기를, “이곳의 지명이 대포(大庖)[9]인데, 공이 여기에 많은 음식과 좋은 술을 차려 놓고 연회를 베풀었으니, 지위를 주다(酒多)[10]로 하여 이찬의 위에 두도록 하겠소.”라고 하고, 마제의 딸을 태자의 배필이 되게 하였다. 주다는 뒤에 각간(角干)[11]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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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지마이사금(祗摩尼師今) : 신라의 제6대 왕. 본서에 따르면, 서기 112년에 즉위하여 134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혁거세의 혈통을 이은 박씨 족단 출신으로, 아버지는 제5대 왕 파사이사금이고, 어머니는 허루(許婁) 갈문왕의 딸 사성(史省) 부인으로 전해진다. 왕비는 마제(摩帝) 갈문왕의 딸인 애례(愛禮) 부인이다. 아들이 없이 사망하여, 유리왕의 맏아들로서 그에게는 백부(伯父)에 해당하는 일성이사금이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 지미(祗味) : 지마이사금의 이칭. ‘味’는 우리말로 ‘맛’의 뜻을 지니는데, 그렇다면 ‘祗味’의 ‘味’는 음차가 아니라 훈차로 사용된 글자일 수도 있다.
- 사성(史省) 부인 : 지마이사금의 어머니로, 앞선 왕인 파사이사금의 왕비이다. 허루 갈문왕의 딸로 전해진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파사이사금 즉위년조의 주석 참조.
- 애례(愛禮) 부인 : 지마이사금의 왕비로, 마제 갈문왕의 딸로 전해진다. ‘김씨’로 나오고 있어, 김씨 족단 출신으로 추정된다. 지마와 애례의 혼인은 기존의 ‘박씨 왕-석씨 왕비’의 혼인 관행이 깨지고, 박씨 족단과 김씨 족단이 혼인을 통해 강고하게 결합하게 된 계기였다고 평가된다(강종훈, 2000, 『신라상고사연구』, 서울대출판부, 117~120쪽).
- 갈문왕(葛文王) 마제(摩帝) : 지마이사금의 왕비인 애례(愛禮) 부인의 아버지로 나오는 인물. ‘김씨’로 전해지며, 본 기사에서 애초에는 ‘이찬(伊飡)’의 지위를 갖고 있었다고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신라를 구성하는 주요 정치 집단 가운데 하나인 김씨 족단의 우두머리였을 가능성이 크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 지마이질금조에는 ‘마제국왕(磨帝國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갈문왕에 대해서는 본서 권1 신라본기1 일성이사금 15년(148)조의 주석 참조.
- 유찬(楡湌)의 못 : 위치는 알 수 없음. 이곳에서 사냥을 마친 후 한기부를 지나가게 되었다는 본 기사의 내용을 참고하면, 왕성을 기준으로 북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한기부(韓岐部) : 신라 6부의 하나로, 본서 신라본기의 다른 곳에서는 대부분 ‘한기부(漢祇部)’로 나오며,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에는 ‘한기부(漢岐部)’로도 나온다. 금석문에서는 ‘한지(漢只)○○’(「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 ‘한지벌부(漢只伐部)’(「경주 월지 출토 「조로이년」명 전 (慶州 月池 出土「調露二年」銘 塼)」) 등의 이름으로 확인된다.
- 이찬(伊飡) 허루(許婁) : 앞서 본서 권1 유리이사금 즉위조에서는 유리이사금의 부인인 ‘박씨’의 아버지로서 ‘허루왕(許婁王)’이라고 나왔으며, 같은 권 파사이사금 즉위조에서는 파사이사금의 비(妃)인 ‘김씨’ 사성부인(史省夫人)의 아버지로서 ‘허루 갈문왕(葛文王)’이라고 나온 바 있다. 여기서는 파사이사금 당시에 한기부(韓岐部)의 ‘이찬(伊湌)’이었던 것으로 나와, 기사마다 약간씩 차이를 보인다.
- 대포(大庖) : ‘포(庖)’는 부엌처럼 음식을 요리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로, ‘大庖’라는 명칭은 큰 잔치가 벌어진 장소를 연상시키기에 적당한 단어가 된다. 지마왕이 태자일 때 혼인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큰 잔치가 있었다는 전승을 바탕으로 후대인이 지명을 윤색한 결과로 추정된다.
- 주다(酒多) : 고려시대인 1103년에 사신으로 왔던 송나라 사람 손목(孫穆) 지은 『계림유사』를 보면, 당시 고려인들이 술[酒]을 ‘수블’이라고 읽는다고 되어 있다. ‘수블’은 곧 ‘’이고 지금의 ‘뿔’과 동일한 발음이다. 그리고 ‘다(多)’는 우리말 ‘한’을 훈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주다는 대략 지금 발음으로 ‘수블한’ 정도로 읽을 수 있고, 이 발음을 다르게 표기하면 서불한이 되며, 그 뜻을 한자로 적으면 각간(角干)이 된다. 한기부의 수장인 허루 이찬이 술과 음식으로 잔치를 열었다고 한 본 기사는 각간이 수블한으로 불렸고, 그것의 또 다른 훈차가 ‘酒多’가 되는 것에 착안하여 후대에 꾸며진 설화라고 할 수 있다(강종훈, 2000, 『신라상고사연구』, 서울대출판부, 117~120쪽).
- 각간(角干) : 신라 경위 17관등제의 제1등에 해당하는 관등인 ‘이벌찬(伊伐飡)’의 이칭 가운데 하나로, 고유어 ‘서불한’을 한자의 뜻을 빌려 아화(雅化)한 명칭이기도 하다. 각간(서불한)은 초창기 신라 6부를 구성하는 핵심 지배집단의 수장들을 대표하는 지위였던 것으로 보이나, 이벌찬의 이칭으로 사용되는 시점에서는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정비되어 가면서 왕 아래 가장 높은 지위에 해당하는 관등으로 성격이 변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서 각간은 신라 제1관등의 성격이라기보다는 초기 6부 연합체적 국가였던 신라를 구성하던 핵심 지배집단의 수장이자 다른 수장들을 대표하는 지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벌찬에 대해서는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9년(32)조의 주석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