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 5대 국왕] 문제 유항(文帝 劉恆, BC 180~157)
- 재위 : 기원전 180년 ~ 기원전 157년 6월
- 출생일 : 기원전 202년
- 사망일 : 기원전 157년 6월
한 태종 효문황제 유항(漢 太宗 孝文皇帝 劉恆)은 고제(유방)의 사남이자 혜제의 이복동생이다. 즉위 전 대왕이었으며, 여태후의 죽음과 함께 형제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아들 효경제와 함께 유교를 통치 철학으로 확립하고, 소모적인 대외원정을 피하는 한편 경제를 안정시켜 문경지치(文景之治)를 이룩하였다.
[기원전 196년] 고제 11년 대나라 왕으로 봉해지다
스스로 대나라 왕(代王)을 일컬으며 한나라에 모반을 일으킨 진희가 고제에게 결정적인 패전을 당한 후 대나라 왕으로 봉해졌고 태원군을 더 받아 태원군 진양현(晉陽縣, 지금의 산시 성 타이위안 시)에 도읍을 두었다가 얼마 후 중도현(中都縣, 지금의 산시 성 핑야오 현)으로 옮겼다.
왕후 왕씨(王氏)와의 사이에서 네 아들을 두었으나 모두 요절했고, 사랑하는 첩 두씨(효문황후)에게서 계, 무 두 아들을 두었다.
부친인 한고조가 죽고 여후 통치기에는 어머니 고황후 박씨가 살아생전 유방의 총애를 많이 받지 못했고 황태자 교체 사건 때도 후계자 싸움에 뛰어들지 않은 덕에 여후의 눈밖에 나지 않아 아이러니하게도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
[기원전 181년] 여태후 7년
적모 여태후와 그 일족이 통치하던 여태후 7년(기원전 181년)에는 후사가 끊긴 조공왕 유회 사후 조왕 후보에 올랐으나 사양하고 대나라에 머물렀다.
[기원전 180년] 황제로 등극하다
여태후 8년(기원전 180년), 여태후가 죽고 주발 · 진평 · 제애왕 유양(劉襄) · 성양경왕(당시 주허후) 등이 여씨 세력을 토벌하면서 황제로 추대되었다. 원래 황제 자리는 관영 등과 함께 여씨 일가를 몰아내는데 공을 세운 제왕(齊王) 유양(劉襄)이 처음 유력하게 거론되었으나, 반정 도중 유양이 유씨 종친을 협박해서 군사를 뜯어낸 일로 원망을 가진 해당 종친이 황제 즉위 단계에서 유양의 성격을 걸고 넘어지면서 반대하는 바람에 조정에서도 의견이 갈리게 된다. 반대측은 대외적으론 제애왕 어머니의 친정인 사(駟)씨 가문의 평판이 좋지 않아 제2의 여씨꼴 날지도 모른다는 구실을 내세웠다. 이에 여씨를 몰아내는데 일조한 진평과 주발 등의 공신들도 편승하자 유양의 즉위는 불가하다는 쪽에 힘이 모였고, 이렇게 되고 보니 마찬가지 이유로 성질이 포악하기로 유명했던 한고조의 7남 회남왕 유장도 제외되어버렸다.
제애왕 유양은 제나라로 돌아갔고, 1년 후 사망한다. 제왕은 아들 유칙이 이어받았고, 문제는 여씨를 몰아내는데 공은 세운 유양의 동생 유장에게도 부친 유비가 과거 여후의 딸 노원공주에게 사실상 반강제로 헌납한 성양군을 돌려주고 왕에 봉하는 것으로 보상을 끝낸다.
[문경의치(文景之治)]
문제는 인군으로 안정과 검약을 실천하였다. 후세의 황제가 자신의 통치를 자랑하려 할 때, ‘나의 정치가 과연 한의 문제만 한가’라고 자문할 정도로 근검절약을 실천에 옮긴 현군이다. 특히 문제의 통치철학은 한 초에 유행하였던 황로학의 영향을 받아 무위자연사상이 정치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이리하여 진의 시황제(始皇帝)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인위적인 무리한 정치를 피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며 순리에 따라 정사를 펴나갔기 때문에 진시황제 이래 혹독하게 시달려 오던 백성들이 안정을 취할 수가 있었다.
특히 유교주의 정치가인 가의(賈誼)가 건의한 치안책(治安策)은 문제의 통치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경제정책면에서는 고조(高祖) 시대의 지조인 15분의 1세를 30분의 1로 감축하였고, 만년에는 토지세를 폐지하였다. 또한 백성의 요역을 경감하고 진 이래의 악법인 연좌제와 신체에 고문을 가하는 육형(肉刑)을 폐지하였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이를 통해 문제 시대에는 이전과는 다른 보다 민본적인 사회로 나아갈 수 있었다. 문제의 통치는 중국 역대의 절대군주가 자신의 치적을 내세우기 위하여 대외원정이나 대토목 사업을 일으킨 것과 같은 인위적인 정치가 아니라 무위의 정치로 백성을 쉬게 한 안정화 정책이었다.
[기원전 174년] 회남왕 유장의 모반 사건
BC. 174년에 있었던 회남왕 유장의 모반사건을 계기로 박사인 가의나 조조(鼂錯)는 중앙정부를 강화하고 지방세력을 약화시키는 강간약지정책(強幹弱枝政策)을 내세워 제후왕의 영지를 삭감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제후국과의 힘 겨루기로 이어져 애써 이룩한 민생의 안정을 흔들 것으로 판단하여 제후왕과의 대결을 피하고 종래의 군국제(郡國制)를 유지하였다.
황제라는 직위에 있음에도 동생만을 걱정했던 평범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문제에게는 회남왕 유장이라는 이복동생이 있었는데 유장은 자신이 문제와 친밀한 황족임을 바탕으로 교만해져 황실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한문제는 유장이 어머니 조씨가 사망하는데 일조한 심이기를 죽였을때도 그를 이해한다는 식으로 딱히 벌하지 않았으나, 유장은 오히려 더욱 교만해지더니 급기야 반란을 획책하다가 발각되었다. 이에 문제는 사형에 해당된다는 문초 결과에도 불구하고 유장을 살려주되 봉국을 빼앗고 촉군으로 유배시키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는데, 유장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도중에 굶어죽었다. 그리고 뒤늦게 이를 보고받자 문제는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며 동생 유장의 시신을 껴안고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문제의 뒤를 이은 경제(景帝)도 대체로 부친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이리하여 문제ㆍ경제 재위 40년간(BC.180 - BC.141)의 안정화 정책으로 황폐한 농촌사회는 휴식을 취하면서 생산력을 증가시켜 국력이 회복되어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이와같은 문경 시대의 사회적 번영과 경제력의 회복은 다음에 오는 무제(武帝)시대의 막대한 국가운영과 대외원정을 감행할 수 있었던 재정과 군사비 조달의 배경이 되었다.
[문제와 말(馬)]
문제는 모두 아홉 필의 준마를 얻었는데, 모두 세상에서 제일가는 명마들이였다고 한다. 말의 이름은 각각 부운(浮雲), 적전(赤電), 절군(絶群), 일표(逸驃), 자연(紫燕), 녹이총(錄離驄), 용자(龍子), 인구(鱗驅), 절진(絶塵)이었다. 이 아홉 필의 말들을 문제는 ‘구일(九逸)’이라고 불렀고 말을 모는 사람은 ‘왕량(王良)’이라고 불렀다.
[문제에 대한 평가]
아들인 경제와 더불어 한나라의 국력을 대폭 키운 장본인으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과서 같은 책에서 언급되는 빈도는 손자인 무제에 비해 적은 편인데, 이는 문제가 극단적으로 대외사업을 자제하여 후세에 자랑할 만한 '눈에 띄는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한 탓이 크다. 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러한 큰 대외사업은 결국 백성들만 죽어나가는 일이다. 무제가 멋있고 폼나는 흉노와의 전쟁에 장장 40년간 매달려, 나중에는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수준까지 이어져나가 엄청난 수준의 물자와 인적자원을 소비한 것과 대조된다.
이러한 문제의 치세에도 비판할 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데, 우선 경제 복구 와중 호족과 대상인 세력들이 불법과 탈법을 통해 자라나는 것에 대해 정책적인 감시와 제재를 하지 않은 채 너무 무위지치적 태도를 보인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또 말년에는 뱃사공 출신인 등통이라는 자를 총애해 등통이 굶어 죽을 운명이란 점쟁이의 말을 듣고 절대 굶어죽지 않게 하겠다며 등통에게 화폐 주조권을 사사로이 내려주는 실책도 범했다.
[가족관계]
- 부 : 전한 제1대 황제 고조
- 모 : 효문태후 박씨(孝文太后 薄氏)
- 왕후(적처) : 대왕후(代王后) - 한 문제가 대왕(代王) 시절에 맞이한 왕후. 문제가 황제로 즉위하기 전에 사망했으며, 황후로 추존치 않아 왕후로 남았다.
4남 모두 요절 - 황후(후처) : 효문황후 두씨(孝文皇后 竇氏) - 본래 후궁이었으나 유항이 황제가 되면서 황후가 됨
장녀 : 관도장공주 유표(館陶長公主 劉嫖)
부마 : 당읍후 진오
- 외손녀 : 진아교(陳阿嬌) - 무제의 황후, 후에 폐출
장남 : 한 경제 유계(漢景帝 劉啟)
- 손자 : 무제
차남 : 양효왕 유무(梁孝王 劉武) - 후궁 : 신부인(愼夫人)
- 후궁 : 윤희(尹姬)
- 후궁 : 미상
3남 : 태원왕 유참(太原王 劉參) - 생모미상
4남 : 양회왕 유읍(梁懷王 劉揖) - 생모미상, 추락사
차녀 : 창평공주(昌平公主) - 생모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