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대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AD 57~80) 9년 : 기원후 65년
▶ 알지가 태어나고 계림을 국호로 삼다 : 65년 03월(음)
- 九年, 春三月, 王夜聞金城西始林樹間有鷄鳴聲. 遲明遣瓠公視之, 有金色小櫝掛樹枝, 白雞鳴於其下. 瓠公還告, 王使人取櫝開之. 有小男兒在其中, 姿容竒偉. 上喜謂左右曰, “此豈非天遺我以令胤乎.” 乃收養之. 及長, 聦明多智略. 乃名閼智, 以其出於金櫝, 姓金氏. 改始林名雞林, 因以爲國號.
- 9년(65) 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金城)[1]의 서쪽 시림(始林)[2]의 나무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호공(瓠公)[3]을 보내 살피게 하니 금빛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보고하니, 왕이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다가 열어보았다. 작은 사내아이가 그 속에 들어 있었는데, 모습이 뛰어나고 훌륭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 아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좋은 후계를 보낸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고,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자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이에 이름을 알지(閼智)[4]라고 하고, 금궤에서 나왔기에 성을 김(金)씨라고 하였다.[5] 시림의 이름을 계림(雞林)이라고 바꾸었는데, 이로 인해 계림이 국호가 되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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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금성(金城) : 신라 초기의 왕성.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21년(B.C. 37)조 기사의 주석 참조.
- 시림(始林) : 김씨의 시조 알지(閼智)가 탄생한 곳으로 전해지는 숲. 금성의 서쪽에 있었다고 한 본 기사에 근거하여, 현재 경주 반월성 서북쪽에 위치한 숲으로 비정한다. 알지의 탄생을 계기로 이름이 계림으로 바뀌었다는 전승으로 인해 ‘계림’으로 불려왔으며, 사적 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숲 안에 조선 순조 때 세워진 계림비각(鷄林碑閣)이 남아 있다.
- 호공(瓠公) : 혁거세거서간 대부터 탈해이사금 대까지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 본 기사 외에 여러 군데에서 그 이름이 보이는데, 본서 혁거세거서간 38년(B.C. 20) 2월조에 마한으로 사신을 간 것으로 나오며, 본서 탈해이사금 즉위조와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제4 탈해왕(第四脫解王)조에는 탈해가 이사금이 되기 전에 탈해의 계책에 의해 자신의 거처를 탈취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탈해이사금이 즉위한 후, 2년 정월에 대보(大輔)로 임명되었다고 전한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38년 2월조 기사의 주석 참조.
- 알지(閼智) : 신라 김씨 왕실의 시조. 본 기사와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김알지 탈해왕대조에 제4대 탈해왕 대에 금성 서쪽 혹은 월성 서리(西里)의 시림(始林)에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궤짝에 담겨 발견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자신은 신라의 왕이 되지 못하였고, 그 7세손인 미추가 김씨로서는 처음 신라의 왕위에 올랐다.
- 금궤에서 … 김(金)씨라고 하였다 : 성씨로서의 ‘김(金)’의 유래를 알지가 태어난 금궤에서 찾는 이 설화는 후대의 윤색에 불과할 뿐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알지의 ‘알(閼: Ar)’이 알타이어로 금(金)을 뜻한다는 것에 착안하여, 당시 신라에서 금을 ‘알’ 또는 ‘아르’로 불렀고, 결국 ‘금(金)’은 ‘알’의 훈차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金哲埈, 1952, 「新羅 上代社會의 Dual Organization(上), (下)」, 『歷史學報』 1, 2).
- 계림이 국호가 되었다 : ‘계림(雞林)’이라는 국호는 완연히 중국적인 표현으로, 7세기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사용된 흔적이 금석문을 포함한 여타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신라를 계림이라고 칭하게 된 것은 663년에 당이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雞林大都督府)로 삼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雞林州大都督)으로 책봉한 데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이 기사에서 전하는 것처럼 알지가 닭 울음 소리와 함께 시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국호를 계림국이라고 했다는 것은 후대인의 부회일 뿐 역사적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당이 신라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책봉하여 신라를 ‘계림’으로 부르게 된 이유는 명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지만, 『삼국유사』 권제4 의해제5 귀축제사(歸竺諸師)조에 천축(天竺)에서는 해동의 나라(즉 신라)를 ‘구구타예설라(矩矩吒䃜說羅)’라고 부르는데 ‘계귀(雞貴)’의 뜻이라고 하며, 그 나라는 ‘계신(雞神)’을 받든다고 한 것을 보면, 외국에서 신라를 떠올릴 때 ‘닭[雞]’을 연상(聯想)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계림이라는 호칭은 아마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참고로 본서에서는 이때 계림으로 바뀌었던 국호가 기림이사금 10년에 다시 ‘신라’로 회복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나물왕 김제상조와 권제2 기이제2 가락국기조 등에 국호로 나오는 ‘계림’을 신라 상고기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고, 애초에 알지로 대표되는 김씨 세력이 경주 지역에 세운 소국의 이름이 곧 ‘계림국(鷄林國)’이었다고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노중국, 1990).〈참고문헌〉노중국, 1990, 「鷄林國攷」, 『歷史敎育論集』 13·14채미하, 2016, 「신라 국호의 양상과 계림」, 『신라사학보』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