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대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AD 24~57) 34년 : 기원후 57년
▶ 탈해가 다음 왕위를 잇도록 유언을 남기다 : 57년 09월(음)
- 三十四年, 秋九月, 王不䂊. 謂臣寮曰, “脫解身聮國戚, 位處輔臣, 屢著功名. 朕之二子, 其才不及逺矣. 吾死之後, 俾即大位, 以無忘我遺訓.”
- 34년(57) 가을 9월에 왕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신료들에게 이르기를, “탈해(脫解)는 몸으로는 나라의 척족(戚族)이고 지위로는 보필하는 신하에 처해 있는데, 공과 명성이 누차에 현저히 드러났다. 나의 두 아들[1]은 그 재주가 그에게 한참 미치지 못한다. 내가 죽은 후에는 그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게 하려 하니, 나의 유훈을 잊지 말라.”고 하였다.
▶ 유리이사금이 죽다 : 57년 10월(음)
- 冬十月, 王薨, 葬虵陵園内.
- 〔34년(57)〕 겨울 10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사릉원(蛇陵園)[2] 내에서 장례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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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나의 두 아들 : 탈해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제5대 왕 파사이사금과, 파사의 아들 지마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제7대 왕 일성이사금을 가리킨다.
- 사릉원(蛇陵園) : 경주시 탑동 67-1번지에 소재한 오릉(五陵)을 가리킨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61년조 기사의 주석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