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제3대 대무신왕(18~44) 즉위하다 [기원후 18년]
三國史記 권 제14 고구려본기 제2
대무신왕이 즉위하다 : 18년 10월(음)
대무신왕(大武神王)이 즉위하였다.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무휼(無恤)이고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장성하여서는 영웅다운 호걸[雄傑]로 큰 지략이 있었다. 유리왕이 재위 33년 갑술년(14)에 〔그를〕 세워 태자로 삼았는데, 그때 나이가 11세였다. 〔유리명왕이 죽자〕 이때에 이르러 즉위하니, 어머니는 송씨(松氏)로 다물국왕(多勿國王) 송양(松讓)의 딸이었다.
- 대무신왕(大武神王) : 고구려 제3대 왕으로 이름은 무휼이다. 본문에 따르면 대무신왕의 재위 기간은 18~44년이다. 제2대 유리명왕의 셋째 아들로서 부여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관계로 요절한 형 도절(都切)과 해명(解明)의 뒤를 이어 태자로 세워져 군무과 국정[軍國]의 일을 맡아본 이후 왕이 되었다. 정복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부여를 제압하고 개마국(蓋馬國)·구다국(句茶國)을 복속시켰으며, 최리의 낙랑국(樂浪國)을 멸망시키고 후한 요동군의 침입을 막는 등 대외적으로도 세력권을 굳건히 함과 함께, 광무제에게 사신을 보내어 친선을 도모하였다. 또 내부적으로는 좌보(左輔)와 우보(右輔)를 임명하고 권세가들의 탐학을 제어하는 등 다양한 치적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 : 대무신왕의 또 다른 왕호. 「광개토왕릉비」에서 ‘대주류왕(大朱留王)’이라 한 것은 대해주류왕과 통하는 표현이다. 본서 권18 고구려본기6 소수림왕 즉위조에 따르면 소수림왕을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이라고도 하였다. 대무신왕과 소수림왕의 왕호가 ‘주류[왕]’이라는 호칭을 공유한 셈이다. ‘주류(朱留)’를 ‘수림(獸林)’으로 보아 대주류(大朱留)를 대무신왕의 장지인 대수촌원(大獸林原)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 반면, ‘주류’의 뜻이 신성하다는 의미의 ‘수리’에 해당한다고 본 견해, 주류가 왕의 휘(諱)일 가능성을 제기한 견해도 있다. 한편 소수림왕이 대무신왕과 유사한 왕호를 지니게 된 배경으로 소수림왕 시기 대무신왕의 무훈이 각인된 결과, 그를 존숭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 무휼(無恤) : 『삼국유사』 권1 왕력편(王歷篇)에는 무휼 외에 대무신왕의 또 다른 이름으로 ‘미류(味留)’가 전하는데, 이는 대무신왕의 이칭인 대해주류왕의 ‘주류(朱留)’를 잘못 표기한 것으로 이해된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429쪽).한편 『위서』 권100 열전88 동이 고구려전에서는 건국신화를 소개한 뒤 ‘주몽-여달(閭達)-여율(如栗)-막래(莫來)’로 이어지는 초기 왕들의 계보를 전하고 있는데, 이를 본서 고구려본기 및 「광개토왕릉비」의 왕계(王系)와 대응해 보고자 하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1) 계보를 중시하여 여달을 유리명왕, 여율을 대무신왕, 막래를 모본왕으로 보기도 하였고, (2) 음가(音價)를 중시하여 여율을 유리명왕, 막래를 모본왕에 비정하기도 하였다. 또 (3) 여달은 계보를 중시하여 유리명왕에, 막래는 부여를 정벌했다는 업적을 중시하여 대무신왕으로 보기도 하였고. (4) 여율을 유리명왕, 막래를 대무신왕에 비정하는 입장도 있다. 주목되는 점은 『위서』 고구려전에서 언급된 막래를 대무신왕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는 것으로, 막래가 부여를 정벌하였다는 것이 본서에 전하는 대무신왕의 업적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다만 어떠한 방식으로든 계보·업적·음가를 합치시킬 수 없기 때문에, 『삼국사기』 및 「광개토왕릉비」는 국가적 차원에서 정립된 공식 왕계를 반영한다면, 『위서』 고구려전은 그 이전 내지 민간에서 전승되던 왕계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 어머니는 송씨로 다물국왕 송양의 딸이었다 : 본서 권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3년(B.C. 17) 10월조에 따르면 송양(松讓)의 딸 송씨는 이때 사망하였다. 본문의 기년을 신뢰한다면 대무신왕은 유리명왕 23년(A.D. 4)에 태어난 것이 되므로,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있다. 이에 무휼을 화희(禾姬)의 소생으로 파악하거나, 송양의 다른 딸과 재혼하였을 가능성을 상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본문의 전거자료가 당대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보자면, 훗날의 사료 정리 과정에서 착오가 생겼다고 볼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실제 대무신왕은 유리명왕과 직접적인 혈연관계로 얽힌 군주가 아니었으나, 훗날 유리명왕과 대무신왕의 혈연을 강조하고자 부자지간으로 설정된 결과 그러한 오류가 발생하였다는 설이 제기되어 참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