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30일 토요일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22대 지증마립간(AD 500~514) 6년 : 기원후 505년

22대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AD 500~514) 6: 기원후 505

 

나라 안의 주··현을 획정하다 : 50502()

 

  • 六年, 春二月, 王親定國內州郡縣.
  • 6(505) 2월에 왕이 몸소 나라 안의 주((()을 획정하였다.[1]

 

실직주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군주로 삼다 : 505()

 

  • 置悉直州, 以異斯夫爲軍主. 軍主之名始於此.
  • 6(505)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2] 이사부(異斯夫)[3]를 군주(軍主)[4]로 삼았다.[5] 군주라는 명칭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6]

 

얼음을 저장하고 선박 이용에 대한 법을 제정하다 : 50511()

 

  • 冬十一月, 始命所司藏氷. 又制舟楫之利.
  • 6(505)겨울 11월에 처음으로 담당 관청에 명령하여 얼음을 저장하게 하였다.[7] 또한 선박을 편하게 이용하도록 하는 법을 제정하였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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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왕이 몸소 나라 안의 주((()을 획정하였다 : 종래에 법흥왕 11(524)에 건립된 울진 봉평리 신라비(蔚珍 鳳坪里 新羅碑)에 주와 군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주목하여 530년대에 주와 군을 설치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전덕재, 2000). 이에 따른다면, 지증왕 6(505)에 주와 군, 현의 영역을 획정하였다는 기록을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 종래에 이와 같은 이유를 들어 이 기록을 도사(道使) 파견지인 행정촌(行政村()이 점차 늘어나 전국화되면서 그들 사이의 관할 영역을 분정(分定)한 사실을 반영한 자료로 이해하였다(朱甫暾, 82). 한편 진평왕 때부터 군사적 긴장도가 높은 접경지역에 현을 설치하기 시작하여 95소경을 완비한 신문왕 5(685)에 전국의 행정촌·성을 현으로 재편하는 작업이 마무리되었다고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었다(金昌錫, 2007).
    〈참고문헌
    朱甫暾, 1998, 新羅 地方統治體制整備過程村落, 신서원
    전덕재, 2000, 6세기 초반 신라 6부의 성격과 지배구조, 韓國古代史硏究17
    金昌錫, 2007, 신라 縣制의 성립과 기능, 韓國古代史硏究48
  2.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 본서 권제35 잡지제4 지리2 명주조에 삼척군(三陟郡)이 본래 실직국(悉直國)이었다고 전한다. 실직국은 현재 강원도 삼척시에 위치하였다. 진흥왕 22(561)에 건립된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에 상주(上州), 하주(下州)가 보인다.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14(553) 7월조에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라고 전하는데, 이를 통해 553년 이전에 신라 영토에 상주와 하주를 설치하였다고 추론할 수 있다. 결국 553년까지 신라에 상주와 하주, 신주만이 존재하였으므로, 지증왕 6(505) 2월에 실직주를 설치하였다는 기록을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 아마도 중대에 군주(軍州)를 주()의 장관으로 이해하고, 군주가 머문 실직지역을 마치 중대의 주치(州治)처럼 파악한 다음, 지증왕 6(505) 2월에 실직주를 설치하였다고 개서한 것으로 이해된다(전덕재, 2014, 異斯夫家系政治的 位相, 史學硏究115, 14~17).
  3. 이사부(異斯夫) : 성은 김씨이고, 나물왕의 4세손이다. 조부(祖父)와 부모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태종(苔宗)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삼국유사권제1 기이제2 지철로왕조에서는 박이종(朴伊宗)이라 하였다. 부계는 김씨이고, 모계가 박씨이기 때문에 이사부의 성이 박씨라고도 전하였다고 짐작된다. 10대 후반인 지증왕대 초반에 가야국을 습격하여 취하였고, 지증왕 4(505)에 실직군주(悉直軍主)로서 실직(강원도 삼척시)에 주둔한 정군단(停軍團)을 지휘하였다. 505년에서 지증왕 13(512) 사이에 하슬라군주(何瑟羅軍主)가 되어 실직에서 하슬라(강원도 강릉시)로 이동하여 주둔한 정군단을 지휘하였고, 5126월에 우산국(于山國: 울릉도)을 정복하여 복속시켰다. 일본서기17 계체천황(繼體天皇) 23(529) 여름 4월조에 상신(上臣) 이질부례지간지(伊叱夫禮智干岐)가 금관(金官: 경남 김해시) 4촌을 공격하여 빼앗았다고 전하는데, 이질부례간지는 이사부를 가리킨다. 540년대 후반 진흥왕 때에 건립된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 新羅 赤城碑)에 대중(大衆) 가운데 이사부지(伊史夫智) 이간지(伊干支: 이찬)가 보이는데, 이사부가 단양 적성의 점령에 관여하였음을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진흥왕 2(541) 3월에 병부령에 임명되어 중앙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총괄하였고, 진흥왕 6(545)국사(國史)의 편찬을 건의하였다. 진흥왕 11(550) 3월에 도살성(道薩城: 충북 증평군 도안면)과 금현성(金峴城: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을 공격하여 빼앗았으며, 진흥왕 23(562) 9월에 대가야(大加耶)를 정벌하는 데에 공을 세웠다(강봉룡; 김창석; 정운용; 전덕재). 이사부에 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44 열전제4 이사부조 참조.
    〈참고문헌
    김창석, 2009, 新羅于山國 복속과 異斯夫, 歷史敎育111
    강봉룡, 2010, 이사부의 생애와 활동의 역사적 의의, 이사부와 동해창간호
    전덕재, 2014, 異斯夫家系政治的 位相, 史學硏究115
    정운용, 2016, 三國時代 新羅 異斯夫軍事 活動, 先史古代50
  4. 군주(軍主) : 본서 권제40 잡지제9 직관하() 외관조에 도독(都督)9명이었다. 지증왕 6(505)에 이사부를 실직주군주로 삼았다. 문무왕 원년(661)에 총관(摠管)으로 고쳤다가 원성왕 원년(785)에 도독으로 고쳤다.”라고 전한다. 이에 따른다면, ()의 장관 명칭이 군주에서 총관으로, 총관에서 도독으로 바뀌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군주의 성격은 시기에 따라 변화가 있었다. 이사금이란 왕호를 사용한 시기에 6부군을 지휘한 사령관, 즉 장군을 군주라고 불렀고, 지증왕 6(505)에 처음으로 왕경 6부인으로 편성된 정군단(停軍團)이 지방에 주둔하였는데, 이때에 정군단의 사령관을 군주라고 불렀다. 당시에 정군단이 파견된 행정촌의 행정을 총괄하는 지방관이 파견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524년에 건립된 울진 봉평리 신라비(蔚珍 鳳坪里 新羅碑)에 실지(悉支), 즉 실직에 군주와 도사가 동시에 파견된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진흥왕 22(561)에 건립된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에서 비자벌(比子伐: 경남 창녕시 창녕읍)군주(軍主), 한성(漢城: 서울특별시)군주, 감문(甘文: 경북 김천시 개령면)군주, 비리성(碑利城: 함남 안변; 북한 강원도 안변군)군주를 사방군주(四方軍主)’라고 표현하였는데, 종래 이를 근거로 하여 진흥왕 16(555)에 사방군주체제가 성립되면서 군주는 지방에 주둔한 정군단(停軍團)의 사령관이면서 상주(上州)와 하주(下州), 신주(新州) 및 동해안의 우추군(于抽郡: 경북 영덕군 영해면실지군(悉支郡: 강원도 삼척시하서아군(何西阿郡: 강원도 강릉시) 등을 행정적으로 총괄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다고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전덕재). 이밖에 중고기에 군주는 시종일관 지방에 주둔한 왕경인으로 구성된 정군단의 사령관이었다고 보는 견해(姜鳳龍, 93~100), 군사적 거점으로서의 주에 파견된 군사령관이면서 동시에 주둔지역을 관할하는 행정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보는 견해(李銖勳, 78~91), 진흥왕 때에 상주와 하주가 설치된 이래 정()은 곧 주치(州治)로서 기능하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군주는 중앙군단장적인 성격을 벗어나 명실상부한 최고상급의 지방관, 즉 주의 장관으로서 자리 잡았다는 견해(朱甫暾, 97~110) 등이 제기되었다.
    한편 본서 신라본기에서 태종무열왕 5(658)까지 주의 장관을 군주라고 부르다가 태종무열왕 7(660)부터 주의 장관을 총관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문무왕 3(663) 이후에 주의 장관을 총관 또는 도독이라고 불렀음을 알려주는 기록을 다수 발견할 수 있다. 혜공왕대에 제작된 사천 선진리 신라비(泗川 船津里 新羅碑)에 주의 장관을 총관이라고 불렀다고 전하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직관지의 기록에서 문무왕 원년에 군주를 총관으로 고쳤다고 언급한 것은 그대로 믿기 어렵고, 문무왕 3년부터 혜공왕대까지 주의 장관을 총관 또는 도독이라고 불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직관지에 원성왕 원년에 총관을 도독이라고 개칭하였다고 전하는 것은 결국 원성왕 원년부터 주의 장관을 단지 도독이라고만 부른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참고문헌
    姜鳳龍, 1994, 新羅 地方統治體制 硏究,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李銖勳, 1995, 新羅 中古期 村落支配 硏究, 부산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朱甫暾, 1998, 新羅 地方統治體制整備過程村落, 신서원
    전덕재, 2001, 신라 중고기 의 성격 변화와 軍主, 역사와 현실40
  5. 이사부(異斯夫)를 군주(軍主)로 삼았다 : 법흥왕 11(524)에 건립된 울진 봉평리 신라비(蔚珍 鳳坪里 新羅碑)실지군주(悉支軍主)’와 더불어 실지도사(悉支道使)’가 보인다. 실지, 즉 실직(悉直)에 군주와 도사를 동시에 파견하였던 사실과 지증왕 6(505) 2월에 실직주를 설치하였다고 보기 어려운 점 등에 의거하건대, 당시 이사부의 공식 직함은 실직주군주가 아니라 실직군주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진흥왕 22(561)에 건립된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에 비자벌군주(比子伐軍主)와 더불어 비자벌정조인(比子伐停助人)이 보인다. 신라인들은 영()을 정()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비자벌정은 비자벌(경남 창녕)에 주둔한 군대의 진영(陣營)을 말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데, 종래에 에 주둔한 군대는 왕경 6부인 출신으로 구성된 군사들로 편성되었다고 보았다(姜鳳龍, 1994, 新羅 地方統治體制 硏究,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14~127). 물론 비자벌정에 주둔한 왕경인 출신 군사로 편성된 군대의 지휘자가 바로 비자벌군주였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실직군주인 이사부 역시 실직지역에 주둔한 왕경 6부인 출신의 군사로 편성된 군단, 즉 실직정(悉直停)을 지휘한 사령관이었고, 실지도사는 실직이라는 행정촌의 행정을 두루 책임지는 지방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6. 군주라는 명칭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 본서 권제2 신라본기제2 벌휴이사금 2(185) 2월조에 파진찬 구도(仇道)와 일길찬 구수혜(仇須兮)를 좌·우군주(·右軍主)로 임명하여 소문국(召文國)을 정벌하였다. 군주의 이름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전한다. 일반적으로 이사금이란 왕호를 사용한 시기의 신라본기 기록에 보이는 좌·우군주는 6부군(六部軍)으로 구성된 군단을 거느리고 군사적인 필요에 따라 수시로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李文基, 1994). 이에 따른다면, 벌휴이사금 22월조의 6부군을 지휘한 군사령관, 즉 장군을 이때부터 군주라고 부르기 시작한 사실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지증왕 6(505) 2월에 실직군주로 임명된 이사부는 실직에 주둔한 왕경 6부인 출신의 군사로 편성된 정군단을 지휘한 사령관이었으므로, 이 기록은 5052월부터 지방에 주둔한 정군단의 사령관을 군주라고 부르기 시작한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전덕재).
    〈참고문헌
    李文基, 1994, 新羅六部兵과 그 性格, 歷史敎育論集13·14
    전덕재, 2014, 異斯夫家系政治的 位相, 史學硏究115
  7. 얼음을 저장하게 하였다 : 본서 권제39 잡지제8 직관중() 내성조에 빙고전(氷庫典)은 대사(大舍) 1, () 1명이었다.”라고 전하는데, 빙고전이 얼음을 저장하는 일을 관장하였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유사권제1 기이제1 노례왕조에 장빙고(藏氷庫)가 보이기도 한다. 현재 경주시 반월성 안에 조선 후기에 축조한 석빙고(石氷庫)가 존재하는데, 이곳에 신라의 빙고가 있었는지의 여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얼음의 용도와 관련해서는 신당서(新唐書)신라전(新羅傳)에 보이는 여름에는 음식물을 얼음 위에 둔다[夏以食置氷上]”는 기록을 주목할 만하다. 한편 고대 중국에서 얼음의 사용은 제사용 술을 차갑게 하기 위한 기능과 빈()에서 사용하는 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權五榮) 얼음을 저장하기 시작한 사실과 신라에서 빈장(殯葬)을 행하기 시작한 사실을 서로 연결시켜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채미하)
    〈참고문헌
    權五榮, 2000, 고대 한국의 喪葬儀禮, 韓國古代史硏究20
    채미하, 2012, 한국 고대의 죽음과 祭禮, 韓國古代史硏究65
  8. 선박을 편하게 이용하도록 하는 법을 제정하였다 : 선박으로 교통과 운반을 편리하게 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한 것으로 이해된다. 역경(易經)계사(繫辭) 하에 나무를 쪼개 배를 만들고 나무를 깎아 노를 만들어 선박의 이로움으로 통행하지 못하던 곳을 건너고 멀리까지 닿게 하여 천하를 이롭게 하니, 환괘(渙卦)에서 취한 것이다[刳木爲舟 剡木爲楫 舟楫之利 以濟不通 致遠以利天下 蓋取諸渙].”라고 전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25대 진지왕(眞智王, AD 576~579) 4년 : 기원후 5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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