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대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AD 500~514) 15년 : 기원후 514년
▶ 아시촌에 소경을 설치하다 : 514년 01월(음)
- 十五年, 春正月, 置小京於阿尸村.
- 15년(514) 봄 정월에 아시촌(阿尸村)[1]에 소경(小京)[2]을 설치하였다.[3]
▶ 6부와 남쪽 지방 사람들을 옮기다 : 514년 07월(음)
- 秋七月, 徙六部及南地人戶, 充實之.
- 〔15년(514)〕 가을 7월에 〔서울의〕 6부와 남쪽 지방의 사람들을 옮겨 〔소경을〕 채웠다.[4]
▶ 지증왕이 죽다 : 514년 (음)
- 王薨. 諡曰智證, 新羅諡法始於此.
- 〔15년(514)〕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諡號)를 ‘지증(智證)’이라 하였는데, 신라에서 시호를 사용하는 법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5]
==========
[각주]
- 아시촌(阿尸村) : 종래에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상주조에 문소군(聞韶郡)의 영현(領縣)인 안현현(安賢縣)의 본래 이름이 아시혜현(阿尸兮縣)이라고 전하는 사실을 주목하여 아시촌을 아시혜현으로 비정하였는데(千寬宇, 1976), 이것은 현재 경북 의성군 안계면에 해당한다. 한편 본서 지리지 강주조에 함안군(咸安郡)의 본래 이름이 아시량군(阿尸良郡)이라고 전하는 사실을 주목하여 아시촌을 오늘날 경남 함안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林炳泰, 1967). 이 밖에 아시촌을 경북 경주시 안강읍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었다(李丙燾, 442쪽). 이들 견해 가운데 현재 아시촌을 경북 의성시 안계면으로 보는 견해가 널리 지지를 받고 있다.〈참고문헌〉李丙燾, 1959, 『韓國史(古代篇)』, 乙酉文化社林炳泰, 1967, 「新羅小京考」, 『歷史學報』 35·36合千寬宇, 1976, 「三韓의 國家形成(下)-「三韓攷」 第3部-」, 『韓國學報』 3
- 소경(小京) : 지방에 설치한 작은 서울을 이르는 특수행정구역이다. 현재 경북 의성군 안계면으로 비정되는 아시촌(阿尸村)에 처음으로 소경을 설치하였고, 장관인 사신(仕臣: 사대등(仕大等))과 차관인 사대사(仕大舍)가 소경에 파견되었다. 진흥왕 18년(557)에 국원(國原: 충북 충주시)에 소경을 설치하면서 아시촌소경은 폐지한 것으로 보이며. 선덕여왕 8년(639) 2월에 하슬라(何瑟羅: 강원도 강릉시)에 북소경(北小京)을 설치하였다가 태종무열왕 5년(658) 3월에 하슬라가 말갈과 잇닿아 있어 사람들이 편안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북소경을 폐지하였다. 이후 678년(문무왕 18)에 강원도 원주시에 북원소경(北原小京)을, 문무왕 20년(680)에 경남 김해시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신문왕 5년(685)에 충북 청주시에 서원소경(西原小京), 전북 남원시에 남원소경(南原小京)을 설치하여 기존의 국원소경과 함께 5소경체제를 갖추게 되었다.종래에 수도의 편재성을 보완하기 위하여 소경을 설치하였다는 견해(藤田亮策), 영토확장에 따른 지방지배의 효율성을 높이고, 피정복지역의 지배층을 연고지로부터 유리시켜 공동적 유제를 단절시킴으로써 재기를 방지하고 그 지배층을 회유 감독하기 위해 소경을 설치하였다는 견해(林炳泰), 신라가 지방지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왕경과 변경지역을 연결하는 거점지역을 개발하여 소경으로 삼았다는 견해(양기석) 등이 제기되었다. 이 밖에도 중고기에 신라가 촌주의 자치력에 크게 의존하여 지방을 통치하였음을 주목하여 지방에 파견된 6부의 관리, 즉 지방관의 통치를 배후에서 지원해주기 위하여 교통의 요지에 6부인들을 집단적으로 이주시켜 소경을 설치하였다는 견해(전덕재), 지방에서 거둔 수취물을 가장 효율적으로 왕도로 운송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에 6부인들을 집단적으로 이주시켜 소경을 설치하였다는 견해(余昊奎), 5세기 말 이후 왕경으로 인구와 재화가 집중되자, 인구와 재화를 분산하기 위하여 소경을 설치하였고, 소경으로 이주한 왕경인들의 경우는 왕경 6부에 편적지(編籍地)를 두어 골품 신분으로서의 특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견해(하일식) 등이 새로이 제기되었다.중대에 소경과 더불어 주치(州治)도 계획적으로 도시를 건설하고, 그 영역을 6부로 구분하였다. 이것은 주치가 지방지배의 주요 거점으로서 부각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에 비례하여 지방민을 통제·감찰함에 있어 소경이 차지하는 비중은 낮아지게 되었다. 신라 말에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농민들의 도적화현상이 빈발하였고, 종종 주치에 거주한 진골귀족이나 지방세력들이 중앙정부에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따라 지방통제의 핵심거점으로서 주치의 기능이 크게 약화되었는데, 이에 대응하여 신라정부는 지방의 원활한 통제를 위해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5소경을 5부(府)로 재편하고, 부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전덕재, 2002).〈참고문헌〉藤田亮策, 1953, 「新羅九州五小京考」, 『朝鮮學報』 5林炳泰, 1967, 「新羅小京考」, 『歷史學報』 35·36합양기석, 2001, 「신라 5소경의 설치와 서원소경」, 『新羅西原小京硏究』, 서경余昊奎, 2002, 「한국 고대의 지방도시 - 신라 5小京을 중심으로」, 『강좌 한국고대사 7-촌락과 도시』,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全德在, 2002, 「新羅 소경의 설치와 그 기능」, 『震檀學報』 93하일식, 2011, 「신라 왕경인의 지방 이주와 編籍地」, 『新羅文化』 38
- 아시촌(阿尸村)에 소경(小京)을 설치하였다 : 의성군 안계면은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위천이 흐르고, 또 낙동강 본류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낙동강 수로를 통하여 안동과 더불어 그 강의 중․하류에 위치한 여러 지역을 연결하기가 용이하다. 게다가 여기서 상주까지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 상주에서 화령을 지나면 보은의 삼년산성에 다다를 수 있다. 한편 안계면 일대에서 예천을 거쳐 영주에 다다를 수 있고, 영주에서 죽령을 넘으면 단양과 충주에 이를 수 있다. 그리고 상주에서 문경 가은면을 거쳐 계립령을 넘으면 충주로 나아갈 수 있다. 결국 안계면은 소백산맥을 넘어 한반도 중부지역과 연결할 때에 중요한 교통의 요지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지증왕대 신라의 서북쪽 국경선은 소백산맥을 넘지 않았다. 5세기 중․후반에 신라는 소백산맥 근처의 국경지역에 집중적으로 성을 쌓아서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이에 따른다면, 안계면 일대는 낙동강 중·상류와 소백산맥 이남의 경북지방을 통제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으로 평가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신라는 서북지방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에 알맞은 곳인 아시촌에 소경을 설치하여 적극 개발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후 아시촌소경에 관한 기록은 더 이상 전하지 않는다. 진흥왕 18년(557)에 국원소경을 설치하면서 아시촌소경을 폐지하고, 거기에 머물던 왕경 6부인들을 국원으로 이주시킨 것으로 짐작된다(全德在, 2002, 「新羅 소경의 설치와 그 기능」, 『震檀學報』 93).
- 6부와 남쪽 지방의 사람들을 옮겨 〔소경을〕 채웠다 : 아시촌을 소경으로 삼고, 그곳을 지방지배의 거점도시로 적극 개발하기 위해 왕경 6부인과 더불어 남쪽 지방의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이주시킨 것으로 이해된다. 다만 남쪽 지방이 구체적으로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 시호(諡號)를 지증(智證)이라 …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 시호는 제왕(帝王)이나 경상(卿相) 혹은 뛰어난 인물이 죽은 후에 그들의 생전의 공덕을 찬양하여 추증(追贈하는 칭호이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제23 법흥왕조에서 “법흥(法興)은 시호이며, 시호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하였다. 법흥왕 22년(535)에 작성된 「울주 천천리 각석 을묘명(蔚州 川前里 刻石 乙卯銘)」 에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이라는 표현이 전하므로, 법흥은 시호가 아니라 법흥왕이 생존하였을 때에 사용한 왕명(王名)임을 알 수 있다. 중국 사서와 「진흥왕순수비」 등에서 진흥왕과 진평왕,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생존할 때에 진흥(眞興), 진평(眞平), 선덕(善德), 진덕(眞德)이라는 왕명을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진흥과 진평, 선덕, 진덕 역시 시호로 보기 어렵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에서 태종은 묘호(廟號), 무열왕은 시호이다. 본서와 『삼국유사』, 금석문 등에서 지증왕의 이름이 지도로(智度盧 또는 智度路 또는 至都盧), 지대로(智大路), 지철로(智哲盧 또는 智哲老), 지절로(只折盧)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나, 그가 살아있을 때에 ‘지증(智證)’이라고 불렀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지증을 시호로 볼 수 있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김희만, 2016), 법흥과 진흥 등의 사례를 감안하건대, 지증왕이 살아있을 때에 지증이란 왕명을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인다. 따라서 신라에서 시호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문무왕이 아버지인 김춘추에게 ‘무열’이란 시호를 추증하면서부터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된다. 참고로 ‘태종무열왕’ 전체를 시호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윤경진, 2013).〈참고문헌〉윤경진, 2013, 「新羅 中代 太宗(武烈王) 諡號의 追上과 재해석」, 『韓國史學報』 53.김희만, 2016, 「신라 지증왕의 王名과 그 성격」, 『서강인문논총』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