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대 법흥왕(法興王, AD 514~540) 1년 : 기원후 514년
▶ 법흥왕이 왕위에 오르다 : 514년 (음)
- 法興王立. 諱原宗 冊府元龜姓募名泰.[정덕본과 을해목활자본에는 泰로 되어 있다. 책부원귀(冊府元龜) 권996 외신부(外臣部) 제역조(鞮譯條)와 《삼국유사》 왕력편(王曆篇)에는 秦으로 되어 있다.], 智證王元子. 母延帝夫人, 妃朴氏保刀夫人. 王身長七尺, 寬厚愛人.
- 법흥왕(法興王)[1]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원종(原宗)[2] 『책부원귀(冊府元龜)』[3]에는 성은 모씨(募氏)이고 이름은 태(泰)라 하였다.[4]이고, 지증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연제부인(延帝夫人)이고 왕비는 박씨 보도부인(保刀夫人)[5]이다. 왕은 키가 7척(尺)이었고, 성품이 너그럽고 후하며 사람들을 사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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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법흥왕(法興王) : 제23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14~540년이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제22 지정마립간조와 제28 진덕여왕조에서 법흥왕 때부터 진덕여왕 때까지 중고(中古)라 하였다. 일반적으로 중고기를 불교식 왕명시대라고 부른다(金哲埈, 44쪽; 조경철). 법흥왕의 재위 기간 동안에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관리의 공복(公服)을 처음으로 제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를 공인하여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또한 상대등과 병부를 설치하여 중앙행정관서를 정비하기 시작하였으며, 경남 김해에 위치하였던 금관국(金官國)을 병합하여 영역을 확장하기도 하였다. 한편 법흥왕의 재위 기간 동안에 신라는 자체의 영역과 주민을 다스리는 6부(部)가 합의하여 국가를 운영하던 정치체제를 일컫는 6부체제를 극복하고 국왕 중심의 집권적인 정치체제를 정비하였다고 이해하고 있다.〈참고문헌〉金哲埈, 1993, 「韓國傳統文化論」, 『韓國史學史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조경철, 2006, 「동아시아 불교식 왕호-4~8세기를 중심으로-」, 『韓國古代史硏究』 43
- 원종(原宗) : 법흥왕 11년(524)에 건립된 「울진 봉평리 신라비(蔚珍 鳳坪里 新羅碑)」에서 법흥왕을 ‘모즉지매금왕(牟卽智寐錦王)’이라고 표현하였고, 법흥왕 26년(539)에 작성된 「울주 천전리 각석 추명(蔚州 川前里 刻石 追銘)」에는 ‘무즉지태왕(另卽知太王)이라고 표현하였다. 『양서(梁書)』 권54 열전제48 제이(諸夷) 동이(東夷) 신라조 등 중국 사서에서는 법흥왕의 이름이 ‘모진(募秦)’이라고 하였다. 한편 「울주 천천리 각석 을묘명(蔚州 川前里 刻石 乙卯銘)」에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이라는 표현이 보여, 법흥왕의 재위 기간 동안에 이름을 사용하여 왕명을 표기하거나 또는 불교 공인 이후에 ‘불법(佛法)을 일으킨 대왕’이란 뜻을 지닌 법흥대왕이라는 왕명을 함께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524년까지 법흥왕을 ‘매금왕’이라고 부르다가, 530년대에 ‘태왕(대왕)’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왕권의 위상 강화와 더불어 정치체제가 6부체제에서 국왕 중심의 집권적인 정치체제로 전환된 사실과 관계가 깊다고 이해되고 있다(全德在, 1996, 『新羅六部體制硏究』, 一潮閣, 137~140쪽). 중대에 법흥왕의 친동생인 사부지갈문왕(徙夫智葛文王)을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 거칠부(居柒夫)를 황종(荒宗), 이사부(異斯夫)를 태종(苔宗)이라고 표기하는 관행이 나타났는데, 모즉지(무즉지)를 원종(原宗)이라고 바꾸어 표기한 것 역시 중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 『책부원귀(冊府元龜)』 : 중국 송나라 진종(眞宗) 경덕(景德) 2년(1005)에 왕흠약(王欽若)·양억(楊億) 등이 칙명(勅命)을 받아 편찬하기 시작하여 대중상부(大中祥符) 6년(1013)에 완성한 당시 최대의 역사 백과전서(百科全書)이다, 전체 31부(部) 1,000권으로 되어 있는데, 『태평어람(太平御覽)』· 『태평광기(太平廣記)』· 『문원영화(文苑英華)』와 함께 송대(宋代) 4대 부서(部書)로 칭해진다. 『책부원귀』 외신부(外臣部) 조공(朝貢)·봉책(封冊)·포이(褒異) 기록에 삼국 및 발해와 중국 왕조와의 교류 사실이 많이 전하며, 김부식 등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에 여기에 전하는 기록을 대부분 인용하였다. 참고로 『삼국사기』 찬자들은 신라본기를 찬술할 때에 주로 『책부원귀』에 전하는 기록을, 고구려본기를 찬술할 때에는 『자치통감(資治通鑑)』, 백제본기를 서술할 때에는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를 참조하는 경향을 보였음이 확인된다(전덕재, 2018, 『三國史記 본기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 성은 모씨(募氏)이고 이름은 태(泰)라 하였다 : 『책부원귀』 권996 외신부(外臣部) 제역(鞮譯)조에는 “양(梁) 고조(高祖) 보통(普通) 2년(521)에 신라왕(新羅王) 모진(募秦)이 처음으로 보낸 사신(使臣)이 백제를 따라와서 봉헌(奉獻)하였다.”라고 전하여 차이를 보인다. 본래 『양서(梁書)』 권54 열전제48 제이(諸夷) 동이(東夷) 신라조에서 “보통 2년에 왕의 (성이) 모(募)이고, 이름인 태(泰)가 처음으로 백제를 따라 사신을 보내 토산물[方物]을 바쳤다.”라고 전하는데, 판본에 따라 ‘명진(名秦)’이라고 표기되어 있거나(급고각본(汲古閣本)), ‘명태(名泰)’라고 표기되어 있다(청 무영전본(武英殿本)·상무인서관백납본(商務印書館百納本)). 『통전(通典)』 권185 변방(邊防) 동이상(東夷上) 신라조에는 “성모명진(姓募名秦)”, 『남사(南史)』 권69 열전제79 이맥하(夷貊下) 동이(東夷) 신라조와 『태평어람(太平御覽)』 권781 사이부(四夷部)2 동이(東夷)2 신라조에는 “성이 모(募)이고 이름은 태(泰)[姓募名泰]”라고 전한다. 본서의 찬자는 『책부원귀』가 아니라 『남사(南史)』 또는 『태평어람』의 기록을 인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법흥왕의 이름이 모즉지(무즉지)였으므로, 모진(募秦)이 정확한 표기이고, 모태(募泰)는 판각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이해할 수 있다.
- 보도부인(保刀夫人) : 『삼국유사』 권제1 왕력 제23 법흥왕조에 법흥왕의 비가 파도부인(巴刀夫人)으로서 출가한 법명(法名)은 법류(法流)이며, 영흥사(永興寺)에 머물렀다고 전한다. 같은 책의 권제3 흥법제3 원종흥법 염촉멸신조에서 법흥왕비가 파조부인(巴刁夫人)이라고 하였고, 또한 “처음으로 역사를 일으켰던 을묘년(535)에 왕비도 또한 영흥사를 세우고 사씨(史氏: 최초의 비구니)의 유풍(遺風)을 사모하여 왕과 함께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법명을 묘법(妙法)이라고 하고, 역시 영흥사에 머물다가 몇 해만에 세상을 떠났다.”라고 하였다. 이 밖에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권1 법공전(法空傳)에서도 법흥왕비가 출가하여 영흥사에 머물렀다고 하였다. 파조부인은 파도부인을 잘못 판각한 것으로 보이고, 보도부인(保刀夫人)과 파도부인은 동일인의 이름을 한문으로 달리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법흥왕 26년(539)에 작성된 「울주 천전리 각석 추명(蔚州 川前里 刻石 追銘)」에 ‘무즉지태왕(另卽知太王)의 비(妃)가 부걸지비(夫乞支妃)라고 전하는데, 부걸지비는 보도부인을 가리킨다고 짐작된다(金龍善, 1979, 「蔚州 川前里書石 銘文의 硏究」, 『歷史學報』 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