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대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AD 479~500) 22년 : 기원후 500년
▶ 왜인이 장봉진을 공격하여 함락하다 : 500년 03월(음)
- 二十二年, 春三月, 倭人攻䧟長峯鎮.
- 22년(500) 봄 3월에 왜인(倭人)이 장봉진(長峯鎭)[1]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 폭풍이 불고, 용이 나타나며 누런 안개가 끼다 : 500년 04월(음)
- 夏四月, 暴風拔木. 龍見金城井. 京都黄霧四塞.
- 〔22년(500)〕 여름 4월에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용이 금성정(金城井)[2]에 나타났다. 서울[京都]에 누런 안개가 사방에 가득 끼었다.
▶ 소지마립간이 날이군에서 파로의 딸 벽화를 만나다 : 500년 09월(음)
- 秋九月, 王幸捺已[정덕본·《삼국사절요》에는 巳로 되어 있고, 본서 권35, 지리지 나령군(奈靈郡)과 주자본·을해목활자본에는 已로 되어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는 已를 따랐다.]郡. 郡人波路有女子, 名曰碧花, 年十六歳, 眞國色也. 其父衣之以錦繡, 置轝冪以色絹, 獻王. 王以爲饋食, 開見之, 歛[정덕본·주자본·을해목활자본에는 歛으로 되어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는 斂을 따랐다.]然糿[정덕본에서 糿로 되어있는데 판각의 오류이다. 주자본·을해목활자본에는 幼로 되어있으며,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도 幼를 따랐다.]女, 恠[정덕본·을해목활자본에는 恠로 되어있는데, 恠는 怪의 속자이다.]而不納. 及還宮, 思念不已, 再三㣲行, 徃其家幸之. 路經古陁郡, 宿於老嫗之家. 因問曰, “今之人, 以國王爲何如主乎.” 嫗對曰, “衆以爲聖人, 妾獨疑之. 何者, 竊聞王幸捺巳之女, 屢㣲服而來. 夫龍爲魚服, 爲漁者所制. 今王以萬乗之位, 不自愼重, 此而爲聖, 孰非聖乎.” 王聞之大慙, 則潛迎[정덕본·《삼국사절요》에는 逆으로 되어 있고, 주자본·을해목활자본에는 迎으로 되어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는 逆을 따랐다.]其女, 置於別室, 至生[정덕본에는 主로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주자본·을해목활자본에는 生으로 되어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는 生을 따랐다.]一子.
- 〔22년(500)〕 가을 9월에 왕이 날이군(捺已郡)[3]에 행차하였다. 군(郡) 사람 파로(波路)에게 딸이 있어 이름이 벽화(碧花)이고 16세였는데, 진실로 나라 안의 절세미인이었다. 그 아버지가 〔딸에게〕 수놓은 비단옷을 입혀 수레에 태우고 색깔 있는 명주로 덮어 왕에게 바쳤다. 왕은 음식을 보낸 것으로 생각하고 열어보니 얌전한 어린 소녀가 오므리고 있으므로 이상히 여겨 받지 않았다. 궁으로 돌아왔는데 생각이 그치지 않아 두세 차례 미행(微行)하여 그 집에 가서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다. 고타군(古陀郡)[4]을 지나가는 길에 어느 할머니[老嫗][5]의 집에 묵었다. 〔왕이〕 묻기를 “지금 사람들은 국왕을 어떤 군주로 생각합니까?”라고 하니, 할머니가 대답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성인으로 여기지만 저만은 그것이 의심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가만히 듣건대 왕이 날이의 여자와 사랑을 나누기 위해 여러 번 미복차림으로 온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무릇 용이 고기의 옷을 입으면 어부에게 잡히는 법[6]입니다. 지금 왕은 만승(萬乘)의 지위[7]에 있으면서 스스로 신중하지 못하니 이를 성인이라 한다면 누가 성인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크게 부끄러워, 그녀를 몰래 맞아들여 별실에 두었는데 아들 하나를 낳기에 이르렀다.[8]
▶ 소지마립간이 죽다 : 500년 11월(음)
- 冬十一月, 王薨.
- 〔22년(500)〕 겨울 11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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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장봉진(長峯鎭) : 위치 미상. 장봉이라는 지명은 신라본기에 한 차례 더 보이는데, 유례이사금 11년(294) 왜병이 장봉성을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장봉성, 장봉진이 왜인의 침입로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소지마립간 15년(493)을 왜적에 대비하여 설치한 장령진(長領鎭)이 장봉진의 오류일 가능성이 있다.
- 금성정(金城井) : 본서 권3 신라본기3 자비마립간 4년(461) 4월조 기사의 주석 참조.
- 날이군(捺已郡) : 현재의 경상북도 영주시. 본서 권35 잡지4 지리2 삭주(朔州)조에 나령군(奈靈郡)은 본래 백제 나이군(奈已郡)인데 파사왕(破娑王)이 취하였고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으며, 고려 때의 강주(剛州)라고 되어 있다. 본서 지리지에 한주(漢州), 삭주, 명주(溟州) 소속 군현이 대부분 ‘본(本) 고구려’라고 되어 있는데, 유독 나이군만 ‘본 백제’라고 되어 있어 논란이 되기도 한다. 강주는 고려 인종 때 순안현(順安縣)이라고 했다가 고종 때 영주(榮州)로 고쳤으며 조선 태종 때 영천군(榮川郡)이라고 하였다. 현재의 영주 시내에 해당한다.
- 고타군(古陀郡) :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본서 권34 잡지3 지리1 상주(尙州)조에 고창군(古昌郡)은 본래 고타야군(古陁耶郡)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으며 고려 때의 안동부(安東府)라고 되어 있다. 현재의 안동 시내에 해당한다. 함안 성산산성 목간에는 ‘古阤’로 표기되어 있다.
- 할머니[老嫗] : 본서 권1 신라본기1 혁거세거서간 5년(B.C.53) 정월조 기사의 주석 참조.
- 용이 고기의 옷을 입으면 어부에게 잡히는 법 : 『설원(說苑)』 정간(正諫)의 “오(吳)나라 왕이 백성들과 함께 술을 마시려고 하자 오자서(伍子胥)가 간하여 말했다. “안 됩니다. 옛날에 흰 용이 차가운 연못으로 내려와 물고기로 모습을 바꾸었습니다. 어부 예저(豫且)가 그 눈을 쏘아 맞추자 흰 용은 하늘 위로 올라가 〔천제에게〕 하소연을 하였습니다. 천제가 말하기를, ‘물고기는 사람들이 쏘아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예저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흰 용은 천제의 귀한 동물이고, 예저는 송(宋)나라의 미천한 신하입니다. 흰 용이 모습을 바꾸지 않았다면 예저 또한 쏘지 않았을 것입니다(吳王欲從民飮酒 伍子胥諫曰 不可 昔白龍下淸冷之淵 化爲魚 漁者豫旦射中其目 白龍上訴 天帝曰 魚固人之所射也 若是豫旦何罪 夫白龍天帝貴畜也 豫旦宋國賤臣也 白龍不化 豫旦不射).”라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귀한 사람이 가볍게 돌아다니면 천한 사람에게 곤욕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 만승(萬乘)의 지위 : 1만 승(乘)의 전차(戰車)와 그에 부속된 군사, 무기 등을 보유하고 동원할 수 있는 거대 군사력과 경제력을 지닌 지위, 즉 천자의 지위를 가리킨다. 1승(乘)은 1대의 병거(兵車)와 갑사(甲士) 3명, 보졸(步卒) 72명, 거사(車士) 25명으로 구성되었다.
- 아들 하나를 낳기에 이르렀다 : 지증마립간 즉위년(500)조에서는 전왕(前王), 즉 소지마립간이 아들 없이 죽었으므로 지증마립간이 왕위를 이어받았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아들은 왕이 죽은 뒤에 태어났거나 왕위 계승에 어떤 하자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소지마립간이 날이군에 행차한 시기는 가을 9월이고, 죽은 시기는 겨울 11월이기 때문에 불과 3개월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을 리가 없다. 따라서 해당 기사는 500년 9월 이후 2~3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 압축, 정리된 것으로도 이해된다(장창은, 209쪽). 한편 벽화가 지방 출신이기 때문에 그 소생은 왕자로서 인정받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였다(李鍾旭, 88~89쪽).〈참고문헌〉李鍾旭, 1980,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장창은, 2008, 『신라 상고기 정치변동과 고구려 관계』, 신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