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대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AD 479~500) 17년 : 기원전 495년
▶ 왕이 신궁에 제사지내다 : 495년 01월(음)
- 十七年, 春正月, 王親祀神宫.
- 17년(495) 봄 정월에 왕이 몸소 신궁(神宮)[1]에 제사를 지냈다.
▶ 고구려가 백제 치양성을 포위하자 장군 덕지를 보내 구해주다 : 495년 08월(음)
- 秋八月, 髙句麗圍百濟雉壤城, 百濟請救. 王命將軍徳智, 率兵以救之, 髙句麗衆潰. 百濟王遣使來謝.
- 〔17년(495)〕 가을 8월에 고구려가 백제 치양성(雉壤城)[2]을 포위하자 백제가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장군(將軍) 덕지(德智)[3]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게 하니, 고구려 무리들이 무너졌다. 백제왕이 사신을 보내 고마움을 표하였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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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신궁(神宮) : 신라 때 설치된 국가적 제사 시설의 하나. 소지마립간 9년(487) 신궁을 설치하고 이때 처음 왕이 몸소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본서 권3 신라본기3 소지마립간 9년(487) 2월조의 주석 참조.
- 치양성(雉壤城) : 현재의 북한 황해남도 배천군 배천읍에 있었던 성. 치양이라는 지명은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에 369년 고구려와 백제의 전투 장소로 나타나 있기도 하다(본서 권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39년; 권24 백제본기2 근초고왕 24년). 본서 권35 지리2 한주(漢州) 해고군(海皐郡)조에 구택현(雊澤縣)은 본래 고구려 도랍현(刀臘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으며 고려 때의 백주(白州)라고 되어 있다. 또 본서 권37 지리4 고구려 한산주(漢山州)조에는 도랍현(刀臘縣)을 치악성(雉嶽城)이라고도 한다고 되어 있다. 치양성을 치악성과 같은 것으로 보아 백주, 즉 현재의 배천에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이 시기에 삼국이 황해도 배천에서 교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기사의 치양성을 원주 치악산에 비정하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문안식, 2006, 『백제의 흥망과 전쟁』, 혜안, 290~291쪽).
- 덕지(德智) : 본서 권3 신라본기3 자비마립간 6년(463) 2월조의 주석 참조. 자비왕 6년(463) 벌지(伐智)와 함께 삽량성에 침입한 왜인을 물리쳤고, 같은 왕 16년(473) 아찬 벌지와 급찬 덕지를 좌·우장군으로 삼았다. 소지왕 17년(495)에는 고구려가 백제 치양성을 포위하자 장군 덕지를 보내 구해주었다.
- 고구려가 … 표하였다 : 이와 같은 내용은 본서 권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4년(495) 8월조와 권26 백제본기4 동성왕 17년(494) 8월조에도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