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대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AD 458~479) 4년 : 기원후 461년
▶ 서불한 미사흔의 딸을 왕비로 삼다 : 461년 02월(음)
- 四年, 春二月, 王納舒弗邯未斯欣女爲妃.
- 4년(461) 봄 2월에 왕이 서불한(舒弗邯)[1] 미사흔(未斯欣)[2]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3]
▶ 용이 금성정에 나타나다 : 461년 04월(음)
- 夏四月, 龍見金城井中.
- 〔4년(461)〕 여름 4월에 용이 금성정(金城井)[4]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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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서불한(舒弗邯) : 신라 경위 17관등 중 제일 높은 이벌찬(伊伐湌)의 이칭이다. 이벌찬에 대해서는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9년(32)조의 이벌찬에 대한 주석 참조.
- 미사흔(未斯欣) : 나물마립간의 아들이자 눌지마립간의 동생. 눌지마립간 17년(433) 5월에 죽어서 서불한(舒弗邯)으로 추증되었다. 본서 권3 신라본기3 실성이사금 원년(402) 3월조의 주석 참조.
- 왕이 … 왕비로 삼았다 : 본서 신라본기에는 자비왕이 즉위 후 미사흔의 딸을 왕비로 맞아 소지를 낳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만,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에는 자비왕의 부인이 파호갈문왕(巴胡葛文王)의 딸, 또는 미질희(未叱希, 또는 未欣) 각간의 딸이라고 되어 있어 파호갈문왕, 즉 복호갈문왕의 딸과도 혼인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윤진석, 2009, 「신라 至都盧葛文王의 ‘攝政’」, 『韓國古代史硏究』 55, 77~78쪽).
- 금성정(金城井) : 금성정은 금성의 우물로 풀어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慶州) 고적(古跡)조에는 금성과 별개로 금성정의 항목을 설정했으며, 그 위치도 조금 다르게 나타나 있다. 즉 “금성정(金城井)은 부내(府內)에 있으며 신라 시조 때에 용이 이 우물에 나타났다.”라고 되어 있고, “금성(金城)은 본부 동쪽 4리에 있으며 신라 시조 혁거세 때에 쌓은 토성(土城)으로 둘레가 2,407척”이라고 하였다. 신라본기에 금성정은 모두 4차례 나오는데(혁거세거서간 60년(3), 유리이사금 33년(56), 자비마립간 4년(461), 소지마립간 22년(500)) 모두 용이 금성정에 나타났다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