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대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AD 458~479) 17년 : 기원후 474년
▶ 일모성 등 여섯 성을 쌓다 : 474년 (음)
- 十七年, 築一牟·沙尸·廣石·沓逹·仇禮·坐羅等城.
- 17년(474)에 일모성(一牟城)[1], 사시성(沙尸城)[2], 광석성(廣石城)[3], 답달성(沓達城)[4], 구례성(仇禮城)[5], 좌라성(坐羅城)[6] 등을 쌓았다.
▶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여 한성을 함락하고 백제왕을 죽이다 : 474년 07월(음)
- 秋七月, 髙句麗王巨連親率兵, 攻百濟. 百濟王慶[정덕본·을해목활자본에는 慶으로 되어 있고,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장수왕 63년조에는 扶餘慶, 《삼국사절요》에는 餘慶으로 되어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는 慶을 따랐다.]遣子文周求援. 王出兵救之, 未至百濟已䧟, 慶亦被害.
- 〔17년(474)〕 가을 7월에 고구려왕 거련(巨連)[7]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백제왕 경(慶)[8]이 아들 문주(文周)[9]를 〔신라에〕 보내 도움을 요청하였다. 왕이 군사를 내어 구해주려고 하였으나 〔신라군이〕 미처 도착하기 전에 백제가 이미 〔고구려에〕 함락되었고 경(慶) 또한 살해되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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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일모성(一牟城) : 현재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에 있는 양성산성. 본서 권36 잡지5 지리3에 연산군(燕山郡)은 본래 백제(百濟) 일모산군(一牟山郡)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고 고려 때까지 그대로 썼다고 되어 있다. 일모성은 일모산군, 즉 연산군에 해당한다. 연산군은 고려 고종 때 이름을 문의현(文義縣)으로 고쳤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5 문의현(文義縣) 산천조와 고적조에는 양성산(壤城山)이 현 서쪽 4리에 있으며 양성산성은 돌로 쌓았고 둘레가 3,754척, 높이가 1장이라고 되어 있다. 일모성, 일모산성은 구체적으로 이 양성산성에 비정할 수 있을 것이다.
- 사시성(沙尸城) : 현재의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에 있었던 성. 본서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원년(661) 9월 19일조에 나오는 사시산군(沙尸山郡)과 동일한 지명으로 보인다. 사시성, 사시산군의 ‘尸’는 ‘ㄹ’ 받침을 나타내므로(梁柱東, 96쪽, 597~598쪽), 살성, 살산군으로 읽을 수 있다. 대체로 소리산현(所利山縣)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전덕재, 35~36쪽). 본서 권34 잡지3 지리1 상주(尙州) 관성군(管城郡)조에 이산현(利山縣)은 본래 소리산현(所利山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고 고려 때까지 그대로 썼다고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5 옥천군(沃川郡) 속현(屬縣)조에는 이산현이 옥천군 남쪽 30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현재의 옥천군 이원면에 해당한다. 이원면 이원리에는 이원리산성이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지만(淸州大學校 博物館, 51~53쪽),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참고문헌〉梁柱東, 1965, 『增訂 古歌硏究』, 一潮閣淸州大學校 博物館 編, 1993, 『沃川郡 文化遺蹟』全德在, 2009, 「관산성전투에 대한 새로운 고찰」, 『新羅文化』 34
- 광석성(廣石城) : 현재의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에 있었던 성. 대체로 같이 언급된 성들과 가까운 지역에서 찾아야 할 것인데, 광석(廣石)이 영동(永同) 혹은 길동(吉同)과 통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광석은 ‘너른들’, 길동은 ‘긴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全德在, 2009, 「관산성전투에 대한 새로운 고찰」, 『新羅文化』 34, 37~38쪽). 본서 권34 잡지3 지리1에 영동군(永同郡)은 본래 길동군(吉同郡)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고 고려 때까지 그대로 썼다고 되어 있다. 현재의 영동군 영동읍에 해당한다.
- 답달성(沓達城) : 현재의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에 있었던 성. 본서 권34 잡지3 지리1에 화령군(化寧郡)은 본래 답달비군(答達匕郡)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고 고려 때까지 그대로 썼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답달비는 답달(沓達)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답달성은 답달비군, 곧 화령군에 해당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8 상주목(尙州牧) 속현(屬縣)조에는 화령현이 (상)주 서쪽 51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경주 남산신성비」 제2비)의 답대지촌(答大支村) 역시 동일한 지명으로 추정된다.
- 구례성(仇禮城) : 현재의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에 있었던 성. 구례성(仇禮城)은 (「경주 남산신성비」 제2비)의 구리성(仇利城 또는 久利城)과 동일한 지명이며, 대체로 고시산군(古尸山郡)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시산군의 ‘尸’는 ‘ㄹ’ 받침을 나타내므로(梁柱東, 1965, 『增訂 古歌硏究』, 一潮閣, 96쪽, 597~598쪽) 골성으로 읽을 수 있으며, 본서 권43 열전3 김유신(하)에는 고리산(古利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본서 권34 잡지3 지리1에 관성군(管城郡)은 본래 고시산군(古尸山郡)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고 고려 때까지 그대로 썼다고 되어 있다. 고려 충선왕 때 옥주(沃州), 조선 태종 때 옥천군(沃川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이러한 연혁에 따른다면 신라 관성군은 현재의 옥천군 옥천읍에 해당한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5 옥천군(沃川郡) 고적(古跡)조에 관성향(管城鄕)이 고을 서쪽 15리에 있으며 이 고을의 옛터인데 지금은 식률평(植栗坪)이라 일컫는다고 되어 있다. 만약 이 기록을 받아들인다면 고시산군의 위치가 식률평 일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식률평은 현재의 충청북도 옥천군 군서면 금산리 증산동 마을에 해당한다.
- 좌라성(坐羅城) : 현재의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에 있었던 성. 대체로 황간현(黃澗縣)의 본명인 소라현(召羅縣)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召羅’는 당시 ‘조라’로 읽었을 가능성이 크다. 본서 권34 잡지3 지리1 상주(尙州) 영동군(永同郡)조에 황간현(黃澗縣)은 본래 소라현(召羅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고 고려 때까지 그대로 썼다고 되어 있다. 현재의 영동군 황간면에 해당한다. 그런데 『호서읍지(湖西邑誌)』 황간현 고적(古跡)조에는 소라현의 구기(舊基)가 현 동쪽 8리에 있으며 당시의 광평리(廣坪里)라고 하였다. 현재의 충청북고 영동군 황간면 광평리에 해당한다.
- 거련(巨連) : 고구려 제20대 장수왕(長壽王)으로 재위 기간은 413~491년이다. 본서 권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즉위년(413)조에는 그의 이름이 거련(巨連)이며 연(璉)이라고도 한다고 되어 있다.
- 경(慶) : 백제 제21대 개로왕(蓋鹵王)으로 재위 기간은 455~475년이다. 본서 권25 백제본기3 개로왕 즉위년(455)조에는 그의 이름이 경사(慶司)라고 되어 있다.
- 문주(文周) : 백제 개로왕(蓋鹵王)의 동생으로 475년 한성(漢城)이 함락당하고 개로왕이 사망하면서 왕위에 올라 웅진(熊津)으로 천도를 하였다. 문주왕(文周王)은 백제 제22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455~475년이다. 본서 백제본기와 『삼국유사』에는 그가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지만,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4, 웅략기(雄略紀) 21년조에는 ‘문주왕(汶洲王)이 개로왕의 동모제[母弟]’라고 되어 있다. 문주가 개로왕대에 상좌평(上佐平)으로 활약하였다는 것과 보국장군(輔國將軍)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문주를 개로왕의 동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 고구려 왕 거련(巨連)이 … 살해되었다 : 고구려의 백제 한성(漢城) 함락 사실은 본서 권15 고구려본기6 장수왕 63년(475)조와 본서 권25 백제본기3 개로왕 21년(475)조에 실려 있는데 신라본기와는 1년의 차이가 난다. 이 중 백제본기의 내용이 가장 풍부하여 그것이 원전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고구려의 백제 한성 함락은 일반적으로 475년의 사실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