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대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AD 458~479) 16년 : 기원후 473년
▶ 아찬 벌지와 급찬 덕지를 좌·우장군으로 삼다 : 473년 01월(음)
- 十六年, 春正月, 以阿湌伐智·級湌德智爲左·右將軍.
- 16년(473) 봄 정월에 아찬(阿湌) 벌지(伐智)[1]와 급찬(級湌) 덕지(德智)[2]를 좌·우장군(左右將軍)으로 삼았다.[3]
▶ 명활성을 수리하다 : 473년 07월(음)
- 秋七月, 葺明活城.
- 〔16년(473)〕 가을 7월에 명활성(明活城)[4]을 수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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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벌지(伐智) : 본서 신라본기에 2차례 등장하는데, 자비왕 6년(463) 덕지(德智)와 함께 삽량성에 침입한 왜인을 물리쳤고, 같은 왕 16년(473) 아찬 벌지와 급찬 덕지를 좌·우장군으로 삼았다.
- 덕지(德智) : 본서 신라본기에 4차례 등장하는데, 자비왕 6년(463) 벌지(伐智)와 함께 삽량성에 침입한 왜인을 물리쳤고, 같은 왕 16년(473) 아찬 벌지와 급찬 덕지를 좌·우장군으로 삼았다. 같은 왕 19년(476) 왜인이 동쪽 변경에 침입하여 장군 덕지가 이를 물리쳤고, 소지왕 17년(495) 고구려가 백제 치양성을 포위하자 장군 덕지를 보내 구해주었다.
- 아찬(阿湌) 벌지(伐智)와 … 삼았다 : 이 기사는 군사 지휘관으로서 장군(將軍)이라는 관직이 제도적으로 설치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이때 장군이 통솔한 주력 부대는 왕경인 부대, 즉 6부병으로 추정되었으며, 이 시기 6부병에 대한 국왕의 통제가 상당히 강화된 것이라고 하였다(李文基, 1997, 『新羅兵制史硏究』, 一潮閣, 86~88쪽).
- 명활성(明活城) : 명활성에 대해서는 본서 권3 신라본기3 실성이사금 4년(405) 4월조의 주석 참조. 최근 명활성의 석축 성벽에 대한 조사에서는 이른 시기의 신라 석성 양식으로 알려진 곡성(曲城)이 확인되어, 이때 토성에서 석성으로의 개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류환성, 36~51쪽).〈참고문헌〉박방룡, 2013, 『신라 도성』, 학연문화사류환성, 2014, 「신라 수도의 방비 태세를 읽다 -경주 명활성 북문지유적-」, 『2013 한국고고학저널』, 국립문화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