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대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AD 458~479) 14년 : 기원후 471년
▶ 모로성을 쌓다 : 471년 02월(음)
- 十四年, 春二月, 築芼老城.
- 14년(471) 봄 2월에 모로성(芼老城)[1]을 쌓았다.
▶ 서울에서 땅이 갈라지고 탁한 물이 솟아오르다 : 471년 03월(음)
- 三月, 京都地裂, 廣袤二[정덕본·《삼국사절요》에는 二로 되어 있고, 주자본·을해목활자본에는 二十으로 되어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는 二를 따랐다.]丈, 濁水湧.
- 〔14년(471)〕 3월에 서울[京都]에서 땅이 갈라졌는데, 가로 세로의 길이가 2장(丈)이었으며 탁한 물이 솟아올랐다.
▶ 전염병이 크게 돌다 : 471년 10월(음)
- 冬十月, 大疫.
- 〔14년(471)〕 겨울 10월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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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모로성(芼老城) : 위치 미상. 모로성(芼老城)을 현재의 경상북도 군위군 효령면에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津田左右吉, 148쪽; 酒井改藏, 40쪽). 이것은 모로성을 효령현(孝靈縣)의 본명인 모혜현(芼兮縣)과 유사한 것으로 본 것이다. 본서 권34 잡지3 지리1 상주(尙州) 숭선군(崇善郡)조에 효령현은 본래 모혜현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으며 고려 때까지 그대로 썼다고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5 군위군(軍威郡) 속현(屬縣)조에는 효령이 (군위)현 서남 35리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현재의 군위군 효령면에 해당한다. 현재 면사무소는 중구리에 위치하는데 이것은 1914년에 정해진 것이고, 조선총독부 1:50,000 지형도를 보면 장기리와 장군리 사이에 (구)효령이라는 표기가 있다.〈참고문헌〉津田左右吉, 1913, 「羅濟境界考」, 『滿鮮歷史地理硏究 1 -朝鮮歷史地理-』酒井改藏, 1970, 「三國史記の地名考」, 『朝鮮學報』 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