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대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AD 4~24) 3년 : 기원후 6년
▶ 시조묘를 세우다 : 6년 01월(음)
- 三年, 春正月, 立始祖廟.
- 3년(6) 봄 정월에 시조묘(始祖廟)[1]를 세웠다.
▶ 일식이 일어나다 : 6년 10월01일(음)
- 冬十月丙辰朔, 日有食之.
- 〔3년(6)〕 겨울 10월 병진(丙辰) 초하루에 일식(日食)이 있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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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시조묘(始祖廟) : 신라에 있었던 사당으로, 국가 제사 중 하나인 시조에 대한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유사한 명칭으로 ‘조묘(祖廟)’, ‘국조묘(國祖廟)’ 등이 있다. 왕실의 시조와 조상을 제사한다는 점에서 개념상 ‘종묘(宗廟)’와 유사하지만, 종묘는 유교 의례를 전제로 한 용어로서 유교 전래 이후의 것으로 파악하고, 시조묘는 그에 앞서 원시 신앙을 바탕으로 한 천신 숭배와 조상 숭배 관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구분하고 있다.신라를 포함하여 한국 고대국가들에서 왕실을 구성한 최고 지배층은 모두 자신들이 천신(天神)의 자손이라는 ‘천손 의식’을 갖고서, 여러 신적·정령적 존재들 중 가장 상위에 있는 천신의 후손인 자신들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당연하다는 정치사상을 내세웠다. 그리고 왕권 강화를 위해 천신과 그 후손인 왕실 조상, 특히 시조에 대한 제사를 중요하게 여기고, 시조를 모시는 사당으로서 시조묘를 만들었다.이런 연유로 신라 초기부터 왕이 새로 즉위하면 시조묘를 찾아 제사를 드리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다. 새로운 왕은 시조묘 제사를 통해 천신의 자손이면서 천신에 비견되는 위상을 가진 시조를 추숭하고, 그 시조를 계승한 자신의 혈통적 신성성과 왕권의 정당성을 나라 안에 널리 알렸을 것이다.본 기사에서 전하는 것처럼 신라의 시조묘는 남해차차웅 3년(A.D. 6) 1월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선왕인 혁거세거서간을 제사하는 사당이었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후 소지마립간에 이르기까지 상고기의 역대 왕들은, 미추이사금의 경우에는 ‘국조묘(國祖廟)’로 다르게 표현되어 있기는 하지만, 모두 즉위 후 시조묘에 제사를 지낸 것으로 신라본기에 기록되어 있다.시조묘 제사는 소지마립간 9년(487)에 새로운 시조 제향 시설로서 ‘신궁(神宮)’이 설치된 뒤로는 오랜 기간 보이지 않다가 신라 하대에 들어가 애장왕 대와 헌덕왕, 흥덕왕 대에 다시 이루어진 것으로 신라본기에 나타나 있는데, 애장왕 대의 시조묘 제사는 종묘로서의 오묘(五廟)와 관련된 것으로 나와, 하대의 ‘시조묘’를 혁거세를 주신(主神)으로 모신 상고기의 시조묘와 동일한 것으로 단정 짓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姜鍾薰, 1994).〈참고문헌〉徐永大, 1991, 「韓國古代 神觀念의 社會的 意味」,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姜鍾薰, 1994, 「神宮의 設置를 통해 본 麻立干時期의 新羅」, 『韓國古代史論叢』 6,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金斗珍, 1999, 『韓國古代 建國神話와 祭儀』, 一潮閣최광식, 1994, 『고대 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朴承範, 2002, 「三國의 國家祭儀 硏究」, 단국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羅喜羅, 2003, 『신라의 국가제사』, 지식산업사채미하, 2008, 『신라 국가제사와 왕권』, 혜안채미하, 2018, 『한국 고대 국가제의와 정치』, 혜안
- 병진(丙辰) 초하루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 『한서』 권99 왕망(王莽)전 거섭(居攝) 원년 10월 병진조에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확인되어, 중국 측 기록을 전재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렇지만 이 날짜에는 중국이나 한반도에 일식이 있지 않아 기록상 착오의 사례로 지적된다(김일권, 2016, 「《삼국사기》 일식기록의 한중 사료 대조와 일식상황 비교」, 『新羅史學報』 37, 173~1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