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대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4~24) 1년 : 기원후 4년
▶ 남해차차웅이 즉위하다 : 4년 03월(음)
- 南解次次雄立 次次雄或云慈充. 金大問云, “方言謂巫也. 丗人以巫事鬼神, 尚祭祀, 故畏敬之. 遂稱尊長者爲慈充.” . 赫居丗嫡子也. 身長大, 性沉厚, 多智略. 母閼英夫人. 妃雲帝夫人 一云阿婁夫人.. 繼父即位稱元.
-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1]이 왕이 되었다. ‘차차웅’[2]은 혹은 ‘자충(慈充)’[3]이라고도 한다. 김대문(金大問)[4]이 이르기를, “방언으로 무당을 일컫는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들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공경하였다. 그래서 존장자(尊長者)를 칭하여 ‘자충’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혁거세(赫居世)의 적자이다. 신장이 크고, 성격이 침착하며 온후하고, 지략이 많았다. 어머니는 알영(閼英) 부인이다. 왕비는 운제(雲帝) 부인[5]이다. 일설에는 아루(阿婁) 부인[6]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를 계승하여 왕위에 올라 원년을 칭하였다.
▶ 칭원법에 대한 사론
- 論曰. 人君即位, 踰年稱元, 其法詳於春秋. 此先王不刋[정덕본·을해목활자본에는 刋으로 되어 있다. 刋은 刊의 오자이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도 刊으로 교감하였다.]之典也. 伊訓曰, “成湯旣沒, 大[정덕본에는 大로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주자본·을해목활자본에는 太로 되어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도 太를 따랐다.]甲元年.” 正義曰, “成湯旣沒, 其歲即大甲元年.” 然孟子曰, “湯崩, 大丁未立, 外丙二年, 仲壬四年.” 則疑若尚書之脫簡, 而正義之誤說也. 或曰, “古者, 人君即位, 或踰月稱元年, 或踰年而稱元年.” 踰月而稱元年者, “成湯旣沒, 大甲元年” 是也. 孟子云, “大丁未立” 者, 謂大丁未立而死也. “外丙二年, 仲壬四年” 者, 皆謂大丁之子, 大甲二兄, 或生二年, 或生四年而死, 大甲所以得繼湯耳. 史記便謂, 此仲壬·外丙爲二君. 誤也. 由前, 則以先君終年即位稱元, 非是, 由後, 則可謂得商人之禮者矣.
- 논하여 말한다. 임금이 즉위하면 해를 넘겨 원년을 칭하니,[7] 그 법이 『춘추(春秋)』[8]에는 상세히 나와 있다. 이는 선왕들이 덜어내지 않은 전범이다. 「이훈(伊訓)」[9]에는, “성탕(成湯)[10]이 죽으니 태갑(太甲)[11] 원년이다.”라 하였고, 『정의(正義)』[12]에도 “성탕이 죽으니 그 해는 곧 태갑 원년이다.”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맹자(孟子)』[13]에는, “탕이 붕어하였는데 태정(太丁)[14]은 아직 즉위하지 않았으니, 외병(外丙)[15] 2년이고 중임(仲壬)[16] 4년이었다.”라고 하였으니, 『상서(尙書)』[17]에 빠진 부분이 있어 『정의』에서 그릇되게 설명한 것이 아닌지 의심이 간다. 혹자는 말하기를, “옛날에는 임금이 즉위하면 혹은 달을 넘겨 원년을 칭하기도 하고[18] 혹은 해를 넘겨서 원년을 칭하기도 하였다.”라고 하는데, 달을 넘겨 원년을 칭한 것이라면 “성탕이 죽으니 태갑 원년이다.”라는 것이 맞는 것이다. 『맹자』에서 “태정은 아직 즉위하지 않았다.”라고 한 것은 태정이 미처 즉위하지 않은 상태에서 죽은 것을 말한 것이며, “외병 2년이고 중임 4년이었다.”고 한 것은 대개 태정의 아들로 태갑에게는 형이 되는 두 사람[19]이 태어난 지 2년이나 4년에 죽어서 태갑이 탕을 계승할 수 있었음을 일컬은 것이다. 『사기(史記)』[20]에서 편의적으로 이들 중임과 외병을 두 임금이라고 말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전자로부터 말하자면 앞 임금이 돌아간 해에 왕위에 올라 원년을 칭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 되겠지만, 후자로부터 말하자면 가히 상(商)나라 사람들의 예를 얻은 것이라 할 만하다.[21]
▶ 낙랑이 침입하다 : 4년 07월(음)
- 元年, 秋七月, 樂浪兵至, 國[정덕본에는 國으로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주자본·을해목활자본에는 圍로 되어 있다. 문맥상 圍가 옳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도 圍를 따랐다.]金城數重, 王謂左右曰, “二聖弃[정덕본에는 弃로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을해목활자본에는 棄로 되어 있다. 弃는 棄의 古字이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는 棄로 표기하였다.]國, 孤以國人推戴, 謬居於位, 危懼若涉川水. 今鄰國來侵, 是孤之不德也, 爲之若何.” 左右對曰, “賊幸我有喪, 妾[정덕본에는 妾로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에는 敢으로 되어 있다. 주자본·을해목활자본에는 妄으로 되어 있다. 문맥상 妄이 옳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도 妄을 따랐다.]以兵來, 天必不祐. 不足畏也.” 賊俄而退歸.
- 원년(4) 가을 7월에 낙랑(樂浪)[22] 병사들이 와서 금성(金城)[23]을 여러 겹으로 에워쌌다. 왕이 좌우 신하에게 말하기를, “두 성인이 나라를 버리시고 내가 국인들의 추대로 왕위에 그릇되게 거하게 되어 위태롭고 두렵기가 마치 하천의 물을 건너는 것 같다. 지금 이웃 나라가 침략해 온 것은 나의 부덕이라 하겠으니, 어찌하면 되겠는가?”라고 하니, 좌우 신하들이 대답하기를, “적들이 우리에게 상(喪)이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망령되게 병사를 동원하여 왔으니 하늘이 반드시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적이 얼마 있지 않아 물러나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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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 신라 제2대 왕. 시조인 혁거세거서간의 아들로, 서기 4년에 즉위하여 21년 간 나라를 다스린 후 서기 24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 남해차차웅조와 기이제1 제2 남해왕(第二南解王)조에서는 남해를 ‘거서간(居西干)’으로도 표기하였다.
- 차차웅 : 남해왕에게 붙여졌던 신라 고유의 왕호. ‘자충(慈充)’으로도 표기되었는데, 통일신라 시대 초반에 활동했던 역사가 김대문이 전하는 바로는 신라에서 ‘무(巫)’를 일컫는 말이었다고 한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차차웅은 본디 제사장을 뜻하는 신라말로서, 신라 초기의 왕이 제사장으로서의 성격을 지녔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羅喜羅, 1990, 「新羅初期 王의 性格과 祭祀」, 『韓國史論』 23,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신라 왕호로서 차차웅은 남해왕에게만 해당하고, 그 뒤로는 ‘이사금’이라는 왕호가 사용되었다.
- 자충(慈充) : 차차웅을 달리 표현한 용어. 자충의 반절(反切)은 ‘중’이 되는데, 불교 승려를 세속에서 중이라고 부른 것은 승려가 지녔던 무(巫)적 성격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鮎貝房之進, 1931, 「新羅王位号並に追封王号に就きて」, 『雜攷』 1).
- 김대문(金大問) : 신라 중대의 역사가. 진골 출신으로, 성덕왕 대 한산주 도독을 지냈다. 주요 저술로는 『계림잡전(鷄林雜傳)』, 『화랑세기(花郞世記)』, 『고승전(高僧傳)』, 『한산기(漢山記)』, 『악본(樂本)』 등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책들은 『삼국사기』가 편찬될 때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본 기사에 보이는 차차웅에 대한 김대문의 설명은 『계림잡전』에서 인용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李基白, 1978, 「金大問과 그의 史學」, 『歷史學報』 77, 2~8쪽).
- 운제부인(雲帝夫人) : 남해차차웅의 부인으로,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제2 남해왕(第二南解王)조에서는 “어떤 데에는 ‘雲梯’라고도 되어 있다. 지금 영일현(迎日縣) 서쪽에 운제산(雲梯山)이 있는데, 가물 때 그 성모(聖母)에게 기도를 하면 들어준다.”라고 소개하였다. 생몰년 및 출신 가계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 아루부인(阿婁夫人) : 남해차차웅의 부인으로 전하는 여성. 운제부인과 동일인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이름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여성일 가능성이 상정된다. 본서 권32 잡지1 제사조를 보면, 신라의 시조묘에 대해 기술하면서 남해왕 대에 시조 혁거세의 사당[廟]을 세우고 친누이 ‘아로(阿老)’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게 했다고 되어 있는데, 아루부인은 이 ‘아로’와 음이 통하여 양자가 같은 인물일 가능성도 고려해 볼 수 있다.
- 임금이 … 칭하니 :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을 의미한다. 새로운 왕이 즉위하더라도 선왕이 죽은 당해 연도가 아니라 그 이듬해부터 재위 연도를 표시하는 방법으로, 『춘추』에서 비롯되어 동아시아 각국의 사서 편찬 때 활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시대에 편찬된 『고려사』 등이 유년칭원법을 적용한 대표적인 사서이다.
- 『춘추(春秋)』 : 중국 춘추시대 노(魯)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유교의 5경 가운데 하나이다. 공자(孔子)가 편술하였다고 전해지며, ‘춘추시대’라는 시대구분의 용어는 바로 이 책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사건의 발생 순서에 따라 월별로 역사를 서술하였는데, 『좌씨전(左氏傳)』,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 등의 주석서가 있다.
- 「이훈(伊訓)」 : 『서경(書經)』의 편목 가운데 하나로, 상(商)나라 탕왕(湯王)의 신하였던 이윤(伊尹)이 탕왕의 손자인 태갑(太甲)을 경계하기 위해 지었다고 전해진다.
- 성탕(成湯) : 하(夏)나라의 폭군 걸왕(桀王)을 내쫓고 상(商)나라를 세운 인물. 탕왕(湯王)으로도 불린다.
- 태갑(太甲) : 상(商)나라의 군주로 상의 건국자 탕왕(湯王)의 맏손자이며, 태정(太丁)의 아들로 전해진다. 숙부인 중임(仲壬)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포악한 성격으로 인해 이윤(伊尹)에 의해 동궁(桐宮)에 유폐되었다가 다시 복위했다고 한다.
- 『정의(正義)』 : 당나라 때 공영달(孔穎達) 등이 주해한 『오경정의(五經正義)』를 가리킨다. 당 태종의 명으로 편찬되었으며, 『시(詩)』, 『서(書)』, 『역(易)』, 『예기(禮記)』, 『춘추(春秋)』 등 오경에 대한 한(漢) 대 이후의 해석을 집대성하고 정리하여 한당(漢唐) 훈고학의 집결판으로 평가된다.
- 『맹자(孟子)』 : 공자의 사상을 발전시킨 유학자 맹자의 언행을 기록한 유교 경전으로, 『논어(論語)』, 『대학(大學)』, 『중용(中庸)』과 함께 사서(四書)의 하나이다. 양혜왕편(梁惠王篇), 공손추편(公孫丑篇), 등문공편(滕文公篇), 이루편(離婁篇), 만장편(萬章篇), 고자편(告子篇), 진심편(盡心篇) 등 모두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 기사에 인용된 구절은 만장편(상)에 들어 있는데, 만장(萬章)이 맹자에게 우왕(禹王)은 왜 천하를 현인에게 맡기지 않고 자기 아들에게 전했는지를 묻자 맹자가 답변하면서 언급한 것이다.
- 태정(太丁) : 『사기』 권3 은본기에 따르면, 상(商)나라의 건국자 탕왕(湯王)의 아들로서, 태자였지만 일찍 죽어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고 한다.
- 외병(外丙) : 『사기』 권3 은본기에 따르면, 상(商)나라의 건국자 탕왕(湯王)의 아들로서, 태자였던 형 태정(太丁)이 즉위하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3년간 재위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서경(書經)』 이훈(伊訓)편 서문에는 외병의 즉위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다.
- 중임(仲壬) : 『사기』 권3 은본기에 따르면, 상(商)나라의 건국자 탕왕(湯王)의 아들로서, 형인 외병(外丙)을 이어 왕위에 올라 4년간 재위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서경(書經)』 이훈(伊訓)편 서문에는 중임의 즉위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다.
- 『상서(尙書)』 : 유교 경전 가운데 오경의 하나인 『서경(書經)』의 원래 이름이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 요(堯)·순(舜)으로부터 하(夏), 은(殷: 商), 주(周) 3대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원래는 그냥 ‘서(書)’라고 불렸는데, 한(漢) 대 이후 『상서(尙書)』로 칭해졌고, 송(宋) 대부터는 『서경』이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졌다. 공자가 고대의 기록 3,240편 가운데 102편을 선별해 편찬한 것이라 전하는데, 그 틀은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서서히 형성되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현재는 100편의 제목이 적힌 목록이 남아 있으나, 본문이 현존하는 것은 요·순부터, 춘추시대 진(秦)나라의 목공(穆公)에 이르는 58편뿐이다. 그중 진(秦)나라의 박사였던 복생(伏生)이 전한 32편은 그 무렵 통용되는 문자로 적었다고 해서 『금문상서(今文尙書)』라 하고, 공자의 자손이 살던 집의 벽에서 나왔다는 25편은 『고문상서(古文尙書)』라고 한다. 이 둘은 엄격히 구별되지 않은 채 경서로 존중되어 오다가, 시대가 흐름에 따라 『고문상서』의 내용에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고, 청나라 초기 염약거(閻若璩)가 『고문상서소증(古文尙書疏証)』을 통해 후세의 위작이라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밝힘으로써, 오늘날에는 이 25편을 『위고문상서(僞古文尙書)』라고 한다.
- 임금이 … 하고 : 유월칭원법(踰月稱元法) 또는 즉위년칭원법을 의미한다.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선왕이 죽은 달을 넘겨 다음 달부터 재위 연대를 표시하는 방법이다. 본서 즉 본서가 채택한 칭원법이 바로 이 유월칭원법이다.
- 태갑에게는 형이 되는 두 사람 : 본 기사에서 외병과 중임을 태정의 아들인 태갑의 형이라고 한 것은 『사기』 권3 은본기에서 양자를 태정의 아우이자 태갑의 숙부들로 전한 것과는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 『사기(史記)』 : 전한(前漢) 무제 시기에 사마천(司馬遷: B.C. 145~86)이 편찬한 중국 고대 역사서. 원래 명칭은 『태사공서(太史公書)』였는데, 후한 대에 『태사공기(太史公記)』로 불렸고, 줄여서 『사기(史記)』로 통칭되었다. 총 130편으로, 황제(黃帝) 때부터 전한의 무제(武帝) 천한(天漢: B.C. 100~97) 연간에 이르기까지 약 3천여 년의 역사가 서술되어 있다. 사마천은 사고에 보관된 『좌전(左傳)』, 『국어(國語)』, 『세본(世本)』, 『전국책(戰國策)』, 『초한춘추(楚漢春秋)』 등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책들을 참고하고, 전국을 다니면서 기록을 채집하여 『사기』를 저술하였다. 본기, 세가, 열전, 서(書), 표(表)의 다섯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 후자로부터 … 할 만하다 : 김부식은 이 사론을 통해 공자의 『춘추』에서 정립된 유년칭원법을 선왕의 전범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상서』의 이훈편 등에서 상(商)나라 초기의 왕위 계승을 유월칭원법(즉위년칭원법)에 맞추어 설명한 것에 따라, 자신이 편찬의 책임을 맡은 『삼국사기』에서 후자를 취하게 된 이유를 제시하였다.
- 낙랑(樂浪) : 낙랑은 한(漢) 무제가 B.C.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에 설치한 중국의 변군(邊郡).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30년(B.C. 28)조 기사의 주석 참조.
- 금성(金城) : 신라 초기의 왕성.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21년(B.C. 37)조 기사의 주석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