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대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AD 4~24) 16년 : 기원후 19년
▶ 북명인이 예왕 인장을 바치다 : 19년 02월(음)
- 十六年, 春二月, 北溟人耕田, 得濊王印, 獻之.
- 16년(19) 봄 2월에 북명(北溟)[1]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도장[2]을 얻어서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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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북명(北溟) :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나, 후대에 오늘날의 강릉을 치소로 하여 명주(溟州)가 두어졌음을 감안하면, 동해안의 강릉 이북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영동예(嶺東濊)가 거주하던 지역이다.
- 예왕(濊王)의 도장 : 한(漢)을 위시한 중국 왕조가 영동 지역의 예족 우두머리에게 내린 도장으로 추정된다. 『삼국지』 권30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예(濊)조에는 정시(正始) 6년(245)에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대방태수 궁준(弓遵)이 이끄는 위(魏)군이 당시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던 영동예(嶺東濊)를 정벌하자 불내후(不耐侯) 등이 항복하였고, 8년(247)에 이들이 조공을 바쳐오니 다시 ‘불내예왕(不耐濊王)’으로 봉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참고로 지난 1966년에 경북 영일군 신광면 마조리(현 주소는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흥곡리)에서 「「진솔선예백장」명 동인(「晉率善穢佰長」銘 銅印)」이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데, 동해안을 따라 예족이 광범위하게 분포하였음을 입증하는 자료로 평가된다(강종훈, 2020, 『사료로 본 한국고대사』, 지성과인성, 62~64쪽). 본 기사는 아마도 이같은 상황을 반영하는 어떤 전승에 토대를 두고, 위에 소개한 『삼국지』 기사를 참고하여 부회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한편 ‘예왕지인(濊王之印)’은 『삼국지』 권30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부여조에서 부여가 예의 땅에서 건국된 나라임을 거론하면서 언급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