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대 나물이사금(奈勿尼師今, AD 356~402) 42년 : 기원후 397년
▶ 하슬라에 흉년이 들어 죄수를 사면하고 세금을 면제하여 주다 : 397년 07월(음)
- 四十二年, 秋七月, 北邊何瑟羅旱·蝗, 年荒民飢. 曲赦囚徒, 復一年租調.
- 42년(397) 가을 7월에 북쪽 변경의 하슬라(何瑟羅)[1]에 가뭄과 누리의 피해가 있어 흉년이 들고 백성이 굶주렸다. 〔이에〕 그 지역의 죄수를 사면하고[2] 1년 동안의 조세[租]와 공물[調][3]을 면제하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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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하슬라(何瑟羅) : 현재의 강릉(江陵).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에 명주(溟洲)는 본래 고구려(高句麗) 하서량(河西良) 하슬라(何瑟羅)라고도 쓴다.인데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명주로 고쳤고 고려 때까지 그대로 썼다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본래 고구려 지명이라고 한 것은 한주(漢州), 삭주(朔州), 명주 소속 군현(郡縣)에 일률적으로 부여된 것이기 때문에 각 지역의 소속 변화에 대해서는 개별적인 파악이 필요하며, 본래 지명이라고 한 것은 경덕왕 때 고치기 직전의 지명으로 보아야 한다. 즉 경덕왕 때 하서량을 명주로 개정했다는 것이다. 명주라는 지명은 본서 편찬 때까지도 유지되다가 고려 충렬왕(忠烈王) 34년(1308)에 강릉(江陵)으로 고쳐서 부(府)로 만들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44, 강릉대도호부). 조선 시대 강릉부의 중심지는 강릉대도호부 관아가 있는 용강동 일대였으며, 객사문(客舍門), 즉 임영관(臨瀛館) 삼문(三門)이 고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보아 그 시기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 지역의 대표적인 신라 고분군인 초당동고분군은 거기에서 동북쪽으로 4㎞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고분군이 조영된 시기, 즉 5~6세기의 신라 거점은 초당동 일대였을 가능성이 크다. 2011년 초당동 인근 강문동에서는 5세기 말에서 6세기 전반기에 사용된 둘레 약 1㎞의 신라 토성이 확인되기도 하였다.〈참고문헌〉李漢祥, 2003, 「동해안지역 5~6세기대 신라분묘 확산양상」, 『嶺南考古學』 32차재동·박성희·조인규, 2015, 「강릉 강문동 신라 토성 -강릉 경포대 현대호텔 신축부지내 유적-」, 『중부고고학회 2014년 유적조사발표회』홍영호, 2016, 『新羅의 何瑟羅 經營 硏究』, 景仁文化社
- 죄수를 사면하고 : 사면(赦免)은 그 적용 지역의 범위에 따라 대사(大赦)와 곡사(曲赦)로 나눌 수 있다. 즉 대사는 사면의 대상이 전국적인 것을 뜻하고 곡사는 일부 지역에 국한하여 적용하는 사면을 말한다(任大熙, 1990, 「恩赦實施를 通하여 본 唐代政治」, 『大丘史學』 40, 106쪽)
- 조세[租]와 공물[調] : 조(租)는 토지에 부과하는 세금 곧 전조(田租)이고 조(調)는 호(戶)에 부과하는 세금 곧 호조(戶調)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