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24일 일요일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7대 나물이사금(AD 356~402) 42년 : 기원후 397년

17대 나물이사금(奈勿尼師今, AD 356~402) 42: 기원후 397

 

하슬라에 흉년이 들어 죄수를 사면하고 세금을 면제하여 주다 : 39707()

 

  • 四十二年, 秋七月, 北邊何瑟羅旱·, 年荒民飢. 曲赦囚徒, 復一年租調.
  • 42(397) 가을 7월에 북쪽 변경의 하슬라(何瑟羅)[1]에 가뭄과 누리의 피해가 있어 흉년이 들고 백성이 굶주렸다. 이에그 지역의 죄수를 사면하고[2] 1년 동안의 조세[]와 공물[調][3]을 면제하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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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하슬라(何瑟羅) : 현재의 강릉(江陵).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에 명주(溟洲)는 본래 고구려(高句麗) 하서량(河西良) 하슬라(何瑟羅)라고도 쓴다.인데 경덕왕(景德王) 16(757)에 명주로 고쳤고 고려 때까지 그대로 썼다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본래 고구려 지명이라고 한 것은 한주(漢州), 삭주(朔州), 명주 소속 군현(郡縣)에 일률적으로 부여된 것이기 때문에 각 지역의 소속 변화에 대해서는 개별적인 파악이 필요하며, 본래 지명이라고 한 것은 경덕왕 때 고치기 직전의 지명으로 보아야 한다. 즉 경덕왕 때 하서량을 명주로 개정했다는 것이다. 명주라는 지명은 본서 편찬 때까지도 유지되다가 고려 충렬왕(忠烈王) 34(1308)에 강릉(江陵)으로 고쳐서 부()로 만들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44, 강릉대도호부). 조선 시대 강릉부의 중심지는 강릉대도호부 관아가 있는 용강동 일대였으며, 객사문(客舍門), 즉 임영관(臨瀛館) 삼문(三門)이 고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보아 그 시기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 지역의 대표적인 신라 고분군인 초당동고분군은 거기에서 동북쪽으로 4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고분군이 조영된 시기, 5~6세기의 신라 거점은 초당동 일대였을 가능성이 크다. 2011년 초당동 인근 강문동에서는 5세기 말에서 6세기 전반기에 사용된 둘레 약 1의 신라 토성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李漢祥, 2003, 동해안지역 5~6세기대 신라분묘 확산양상, 嶺南考古學32
    차재동·박성희·조인규, 2015, 강릉 강문동 신라 토성 -강릉 경포대 현대호텔 신축부지내 유적-, 중부고고학회 2014년 유적조사발표회
    홍영호, 2016, 新羅何瑟羅 經營 硏究, 景仁文化社
  2. 죄수를 사면하고 : 사면(赦免)은 그 적용 지역의 범위에 따라 대사(大赦)와 곡사(曲赦)로 나눌 수 있다. 즉 대사는 사면의 대상이 전국적인 것을 뜻하고 곡사는 일부 지역에 국한하여 적용하는 사면을 말한다(任大熙, 1990, 恩赦實施하여 본 唐代政治, 大丘史學40, 106)
  3. 조세[]와 공물[調] : ()는 토지에 부과하는 세금 곧 전조(田租)이고 조(調)는 호()에 부과하는 세금 곧 호조(戶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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