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대 나물이사금(奈勿尼師今, AD 356~402) 26년 : 기원후 381년
▶ 흉년이 들고 백성들이 굶주리다 : 381년 (음)
- 二十六年, 春夏旱, 年荒民飢.
- 26년(381) 봄과 여름에 가물어 흉년이 들고 백성들이 굶주렸다.
▶ 위두를 전진에 사신으로 파견하다 : 381년 (음)
- 遣衛頭入符[정덕본에는 符로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주자본·을해목활자본에는 苻로 되어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는 苻를 따랐다.]秦[정덕본에는 판각이 불분명하게 되어 있으나, 《삼국사절요》·주자본·을해목활자본에는 秦으로 되어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도 秦을 따랐다.], 𧴨方物. 符[苻의 잘못이다.]堅問衛頭曰, “卿言海東之事, 與古不同, 何耶.” 荅曰, “亦猶中國, 時代變革, 名號攺易, 今焉得同.”
- 〔26년(381)〕 위두(衛頭)를 부씨(苻氏)의 진(秦)[전진(前秦)[1]]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부견(苻堅)[2]이 위두에게 묻기를, “경이 말하는 해동(海東)의 일이 옛날과 같지 않으니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였다. 〔위두가〕 답하여 말하기를, “역시 중국과 마찬가지로 시대가 변혁되고 명칭이 바뀌었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3]라고 하였다.
==========
[각주]
- 전진(前秦) : 중국 5호 16국의 하나(351~394). 351년 저족(氐族)의 추장 부건(苻健)이 장안(長安)을 공략하여 도읍으로 정하고 스스로 대진 천왕 대선우(大秦天王大單于)라고 하였으며, 352년에는 황제(皇帝)를 칭하고 국호를 진(秦)이라고 하였다.
- 부견(符堅) : 전진(前秦)의 제3대 황제(재위 357∼385). 태학을 정비, 학문을 장려하고 농경을 활발히 일으켰다. 특히 한인(漢人) 학자 왕맹(王猛)의 보필로 국세를 크게 떨쳤고 전연(前燕)과 전량(前涼)을 멸했다. 전진의 위세는 동쪽 고구려로부터 서쪽 타림 남서부 호탄에까지 미쳤다. 강남(江南)까지 병합하고자, 383년 대군을 거느리고 동진(東晉)을 공략하였으나 비수(淝水)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이어 항복한 장수 가운데 모용수(慕容垂) 등이 등을 돌렸고, 385년 후진(後秦)의 요장(姚萇)에게 붙잡혀 살해되었다.
- 위두(衛頭)를 … 있겠습니까 :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04 진기(晉紀)26)에는 태원 2년(377) 봄에 고구려, 신라, 서남이(西南夷)가 전진(前秦)에 사신을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본서 신라본기에서는 이와 같은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한편 (『태평어람(太平御覽)』권781 사이부(四夷部)2 동이(東夷)2 신라)에는 “秦書曰 符堅建元十八年(382) 新羅國王樓寒遣使衛頭獻美女”이라 하여 본서와 1년의 차이가 나지만 같은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다. 이때 신라의 사신 파견은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통한 것이란 이해(李丙燾, 401~402쪽)가 일반적이다.〈참고문헌〉李丙燾, 1959, 『韓國史(古代篇)』, 乙酉文化社여호규, 2000, 「4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고구려 대외정책의 변화-對前燕關係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36전덕재, 2000, 「4세기 국제관계의 재편과 신라의 대응」, 『역사와 현실』 36장창은, 2008, 「김씨왕실의 개창과 고구려의 내정간섭」, 『신라 상고기 정치변동과 고구려 관계』, 신서원조범환, 2017, 「신라 奈勿王代 前秦과의 交涉과 그 정치적 배경」, 『新羅史學報』 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