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대 기림이사금(基臨尼師今, AD 298~310) 1년 : 기원후 298년
▶ 기림이사금이 즉위하다 : 298년 12월(음)
- 基臨 一云基立.尼師今立. 助賁尼師今之孫也, 父乞淑用[정덕본에는 用으로 되어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는 자형과 문의(文意)를 보아 伊로 표기하였다.]湌 一云乞淑[정덕본에는 淑으로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에는 馭로 되어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는 淑을 따랐다.]助賁之孫也.. 性寬厚, 人皆稱之.
- 기림(基臨)[어떤 글에서는 기립(基立)이라 하였다.]이사금(尼師今)[1]이 왕위에 올랐다.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2]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걸숙(乞淑)[3] 이찬(伊湌)[4]이다. 어떤 글에서는 걸숙이 조분이사금의 손자라 하였다. 성품이 너그럽고 덕이 두터워 사람들이 모두 왕을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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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기림이사금(基臨尼師今) : 생몰년은 미상~310년이며, 298~310년까지 재위한 신라 제15대 왕이다. 계보상 성은 석(昔)이나 이 당시 성을 사용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다. 기림을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에는 ‘基臨’으로 표기하고 있고, 또 기립(基立)이라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본 즉위년조에는 제11대 왕 조분이사금의 아들인 걸숙(乞淑)의 아들이라 되어 있어, 조분이사금의 손자이자 전왕인 제14대 유례이사금의 조카가 된다. 그러나 이 기사 세주에 걸숙이 조분이사금의 손자라고 하는 설도 있다고 적혀있으며,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에는 기림이사금이 조분이사금의 둘째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본 기사에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에는 아이혜부인(阿爾兮夫人)이라 기재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아버지 걸숙과 아들 기림의 정보가 뒤섞이면서 나타난 오류로 추정되며, 기림은 조분의 손자일 가능성이 높다.
-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 신라 제11대 왕이다. 본서 권2 신라본기2 조분이사금 즉위년(230)조의 조분이사금에 대한 주석 참조.
- 걸숙(乞淑) :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권4에는 ‘걸어(乞馭)’로 적혀있다. 조분이사금의 아들 혹은 손자라는 것 외에 그에 대한 정보는 일체 없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제1 왕력제1에 기림이사금의 어머니를 아이혜부인(阿爾兮夫人)이라고 한 기록이 있는데, 본서 조분이사금 즉위년(230)조에서는 조분이사금의 왕비를 아이혜부인으로 전하고 있다. 아마 『삼국유사』의 기록은 아버지 걸숙과 기림이사금의 가계에 대한 정보가 섞이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추정되며, 걸숙이은 조분이사금과 아이혜부인의 아들인 것으로 여겨진다. 또 조분이사금 사후 첨해이사금(동생), 미추이사금(사위), 유례이사금(아들), 기림이사금(손자, 걸숙의 아들)이 차례로 즉위하였는데, 이를 통해 신라 상대 왕위계승이 형제 상속 중심이었을 가능성이 상정되기도 한다(선석열, 2015). 그러나 이와 반대로 상대에도 기본적으로 적자 상속이 원칙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박미선, 2018)〈참고문헌〉선석열, 2015, 『신라 왕위계승 원리 연구』, 혜안박미선, 2018, 「신라 진지왕 폐위에 관한 재검토-신라 상대 왕위계승원리와 관련하여-」, 『온지논총』 55
- 이찬(伊湌) : 신라 경위(京位) 17관등(官等) 중 제2등에 해당하는 것이다.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9년(32)조의 이척찬에 대한 주석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