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대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 AD 284~298) 10년 : 기원후 293년
▶ 사도성을 고쳐 쌓고 사벌주의 호민을 이주시키다 : 293년 02월(음)
- 十年, 春二月, 攺築沙道城, 移沙伐州豪民八十餘家.
- 10년(293) 봄 2월에 사도성(沙道城)[1]을 고쳐 쌓고 〔그곳으로〕 사벌주(沙伐州)[2]의 호민(豪民) 80여 집을 이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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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사도성(沙道城) : 위치 미상의 성이다. 본서 권2 신라본기2 아달라이사금 9년(162)조의 사도성에 대한 주석 참조.
- 사벌주(沙伐州) :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일대로, 원래는 진한 소국 중 하나인 사벌국(沙伐國)이었다. 본서 권34 잡지3 지리1 상주(尙州)조에 의하면, 첨해왕 때에 사벌국을 취하여 주로 삼았다고 전하나, 주의 설치는 늦어도 6세기 중반으로 이는 부회된 표현으로 이해되며 본 기사의 사벌주도 마찬가지이다.한편 지리지에는 법흥왕 12년(525) 군주(軍主)를 두고 상주(上州)로 삼았다고 하며, 또 본서 권4 신라본기4 법흥왕 12년 2월조에서는 대아찬 이등(伊登)을 사벌주군주(軍主)로 삼았다고 한다. 각각의 기록에서 상주와 사벌주로 이 지역에 대한 주의 명칭이 다르게 나타나는데,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에 따르면 상주(上州) 단위는 군주가 아니라 행사대등이 관할하였으므로, 군주의 설치와 함께 상주로 삼았다는 기록은 잘못이라 할 수 있다. 사벌주와 관련하여 본서에는 진흥왕 18년(557)에는 사벌주를 폐지하고 감문주(甘文州)를 두었다가, 신문왕 7년(687) 일선주(一善州)를 없애고 사벌주를 다시 설치하면서 파진찬 관장(官長)을 총관으로 임명하고, 주치에 축성이 이루어졌음이 기록되어 있다. 경덕왕 16년(757)에는 그 명칭이 상주(尙州)로 바뀌었다. 이외에 신문왕 11년(691), 성덕왕 7년(708)에는 사벌주에서 중앙에 상서물을 바친 기록이 있다. 금석문 자료로는 통일신라 말의 것으로 추정되는 「상주 복룡동 납석제 유물 명문 (尙州 伏龍洞 蠟石製 遺物 銘文)」에서 ‘사벌주희(沙伐州姬)’라는 명문이 확인된다(윤선태, 2009, 「尙州 伏龍洞 256번지 유적 출토 新羅 蠟石製 銘文遺物」, 『한국 고대사 연구의 현단계』, 주류성출판사).